조선의 역사는 잊어진 과거가 아닌 우리가 사는 삶 속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역사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해야 미래를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시대정신을 가질 수 있다. 조선의 22대왕으로서 '효를 통한 정치[孝治]'로 표상되는 正祖. 그가 살았던 18세기는 士大夫 중심의 사회로 임진의 난과 병자의 난을 겪은 후, 역사적으로 개혁이 요청되던 시기였다.
조선 왕조는 신분세습에 의한 출신과 배경을 중시하여 뛰어난 능력과 학식이 있어도 庶孼에겐 입신의 길이 막혀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서얼들에게도 재능과 능력이 존재한다면 입신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했다. 각종 제도를 一新하여 가문과 당파 위주가 아닌 실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정을 이끌었다. 따라서 정조대는 兩班은 물론 中人, 庶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문화에 관심이 크게 모아지던 이른바 文藝復興期였다.
이런 경향을 일반적으로 해석할 때 '18세기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그림에서는 '眞景山水'라는 국화풍, 글씨에선 '東國眞體'라는 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固有化에 따른 문화의 독창성의 발로이며, 이런 바탕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까지 더해져 문화정책의 확대는 물론 선진문화인 乾隆文化까지 수용됨으로서 조선후기는 이른바 문화적 황금시대로 불릴 수 있었다.
정조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효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놀라운 변화를 이뤄냈다. 이런 변화의 이면엔 인륜의 도리인 효가 작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교는 인간을 자연의 질서 속에서 태어난 사회적 존재로 보았고, 나에게 생명을 주고 양육한 부모에게 감사하고 보답하는 효의 마음이 존재한다면, 그 마음은 이웃과 사회, 만물에까지 이른다고 보았다. 즉 개인의 효는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세상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으로 널리 퍼져 나감을 인식한 결과다.
이러한 구조를 인식한 정조는 왕권 강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유교적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라 여기고 五倫을 재정비한 것이다. 오륜의 근간은 孝가 중심이며, 이것을 미루어 확충하면 자연히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孝治]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獅馹스님의 도움으로 불교 경전 가운데 효를 강조한 『父母恩重經』을 간행하여 報恩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교화의 일환으로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 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입문서와 같은 『小學』과 향촌의 공동체 조직을 재구성한 『鄕禮合編』, 『五倫行實圖』를 간행하였다. 『대부모은중경』과 『오륜행실도』를 간행하여 불교와 유교의 조화를 꾀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본 논문은 조선시대 문화정치의 서막을 알리는 孝를 바탕으로 한 政治를 구현한 正祖의 孝治와 佛敎觀에 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나눠볼 수 있다. 첫째, 효치의 본질과 그 역사성을 고찰하는 것으로 한다. 둘째, 정조가 효치를 구현한 유교의 이론적 근거와 합리적인 보편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한다. 셋째, 불교관 측면에서 정조의 효치 관념이 정조의 불교관에 어떻게 반영되어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한다. 넷째, 이상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조 효치의 특징과 정조 불교관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유교의 전통적 효와 불교에서 구현한 효를 변화에 적용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효가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맞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21세기를 주도하는 가치관으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효를 재해석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방법론을 본 연구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효의 정신이 단지 가정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닌, 이웃과 사회, 정치, 종교, 철학적 관계로 이어지는 인류애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