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은 한국사에서 특별한 위상과 의미를 갖는다. 의병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목숨을 걸고 義를 위해 나섬으로써 현재 우리의 존재와 가치를 지켜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강원도 영동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乙未義兵의 義兵將 閔龍鎬에 대해서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민용호 연구에 주로 활용되는 핵심자료는 민용호가 직접 편찬한 「關東倡義錄」이다. 이는 민용호를 살펴보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이며, 嶺東 지방의 을미의병 관련 자료로는 이것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까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저술한 자료를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민용호가 여주, 원주, 강릉으로 이동해 가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는 단계에 대해서도 「關東倡義錄」만을 그대로 수용하는 과오를 경계해야 한다. 어린 나이에, 기반도 없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형성된 다른 의병과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활동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무리한 정황으로 보인다. 오히려 활동의 재정적 지원, 지역사회의 인적 지원 등이 배후 세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민용호가 저술한 「關東倡義錄」에 근거하여 민용호의 家系에 대해 별 의심 없이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민용호가 1897년에 편찬한 「關東倡義錄」과 1889년 간행한 규장각 소장본, 1923년 간행본, 1973년 간행본 세 종류의 여흥 민씨 족보 기록이 전부 서로 다르다는 점은 중요한 관심 대상이다. 여흥 민씨 족보가 1889년, 1923년, 1973년을 거치면서 민용호 관련 가계 내용을 조금씩 바꾸어 가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의 변화 과정이 「關東倡義錄」의 내용을 수용해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의도된 윤색의 과정으로 파악해 볼 여지가 있으므로 「關東倡義錄」과 1973년 여흥 민씨 족보 중 관련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민용호의 학문적 계보에 대해 「關東倡義錄」에서, 초기에는 蘆沙 奇正鎭 系列과 연결하려 하고, 후에는 華西 李恒老 系列과 연결하려 한다. 어린 시절 기정진의 손자이자 제자인 기우만에게 한 번의 말씀(가르침)을 들었다는 점을 근거로 기정진 계열과 연결하려고 한다. 후에는 이항로의 문인에 속하는 박문오를 민용호 스스로 스승으로 섬겼다고 하며, 이를 토대로 화서학파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신빙성의 문제가 있으며, 학문적 이론과 성과도 고려하지 않은 채 과도하게 연결을 시도하는 것이다.
「關東倡義錄」 집필 당시 10일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3년간의 의병 활동에 대한 세세한 일들을 모두 기억하여 기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단기간에 작성하다 보니 잘못 기록하는 오류나 모순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을 위해 의도적으로 각색하여 정리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關東倡義錄」만을 수용하여 의병 활동의 성과와 업적을 그대로 인정하는 과오를 경계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민용호의 의병 진영 해산 이후 행적에 대해서도 민용호가 쓴 「西征日記」, 「江北日記」, 민용호가 사망하고 25년이 지난 후에 쓰인 1947년 「行狀」을 비판적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민용호의 행적은 대체로 고종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직책을 중심으로 관직이 부여되고 있다. 또한, 보부상 조직과 관련된 활동이 많다. 보부상 관련 조직은 고종이 배후에서 조율하고 활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민용호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활용되는 인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關東倡義錄」, 「西征日記」, 「江北日記」의 서술 태도에 차이가 있다. 이로 보아 江北日記 는 민용호가 쓴 것이 아닐 가능성도 보인다. 더군다나 1903년 이후에 중국으로 약을 구하러 세 차례 넘어갔다는 기록 외에는 1922년까지 20년 가까지 행적이 거의 묘연한 것도 의구심이 든다.
「關東倡義錄」 의 전투 성과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1896년 2월 3일 이후 2월 22일까지 일본인 111명을 잡아 죽이고, 4월 11일에 통천에서 일본 군함을 공격하여 97명을 효수하였으며, 4월 20일에는 묵호 앞바다에서 3척의 배를 전복시켰다는 「關東倡義錄」 의 내용은 『駐韓日本 公使館記錄』과 비교하여 볼 때, 과장의 정도를 넘어 허구에 가까울 가능성이 있다.
또한, 민용호 의병 진영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이 민용호의 뛰어난 지도자적 능력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각자의 필요 때문에 민용호 의병에 합류하기도 하고,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활동하기도 함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최문환 의병의 경우, 최문환 스스로가 주도하여 때로는 춘천의병과 연합하고, 때로는 민용호 의병과 연합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과정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강릉의 지역색과 지역 세력의 입지, 의도 등을 단순하게 바라보면 민용호 및 관련 의병에 대한 이해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 민용호가 명분싸움만으로 강릉에 입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강릉에서 동학 농민운동 토벌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이 회원의 선교장 세력만 보더라도, 단순하게 명분 싸움에서 밀려 민용호를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부류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민용호의 강릉 입성은 강릉 토착세력과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강릉 토착세력이 고종, 흥선 대원군, 홍재구, 민용호 등 외부 세력을 필요로 하였을 수 있다. 즉, 강릉 토착세력의 의지 때문에 민용호가 강릉에 입성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횡성 홍재구의 역할이 생각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있다. 홍재구가 외부 세력과 강릉 토착세력 사이에서, 두 세력을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박동의나 최중봉을 활용하여 민용호 의병에 대해 간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민용호의 강릉 입성 역시 홍재구가 일정 부분 관여했을 수 있다. 이를 넘어 원산 진격 작전에서 춘천 등의 의병과 강릉 민용호 의병 연합을 조율하고, 작전 수행에 일정 부분 간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홍재구의 주체적 역할 가능성을 보다 강하게 상정하여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따라서 다양한 가능성과 관련 기록에 대한 의구심을 토대로 민용호와 민용호 의병의 활동을 과도하게 평가한 부분을 재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