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저는 인드라(Indra)의 무기인 Vajra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불가에 유입되어 제석천과 금강역사의 지물로 자리잡았다. 초기의 금강저는 절굿공이 형태나번개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금강저라는 명칭은 경전을 통해 살펴본 결과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금강'이라는 재질과 '공이'라는 형태가 결합되어 탄생했다.
금강저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석굴암 제석천의 지물로 처음 등장한다. 고부는 미늘처럼 표현되었으며, 파부는 장식이 없는 원통형이다. 고부 받침은 표현되지 않았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불화와 실물 금강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불화 가운데 금강저가 표현된 작품은 아미타팔대보살도, 지장시왕도, 천수관음보살도, 사경변상도, 석가삼존십육나한도로 모두 5종류이다. 불화에 등장하는 금강저는 그 형태와 지물로 삼은 존상의 성격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독고저는 금강수보살, 지국천왕, 신장상과 같은 호국신의 지물로 표현되었다. 둘째, 천수관음보살도에서는 금강저인 독고저와 발절라인 삼고저가 따로 표현되어 당시의 형태에 따른 명칭에 대하여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석가삼존십육나한도는 삼고저와 삼고령을 통한 의례를 표현하고 있다.
실물 금강저는 28점이 남아있고 이 가운데 독고저는 한 점뿐이며 모두 삼고저나 오고저의 형태이다. 고부, 파부, 고부 받침의 형태에 따라 유형을 분류할 수있다. 고부는 형태에 따라 3자 유형과 C자 유형 두 가지로 구분 할 수 있으며, 고부 받침은 사자형, 동물형, 꽃받침형, 받침이 표현되지 않은 유형의 네 가지로 구분이 가능하다. 파부는 원통형과 고복형의 두 가지 유형이다. 시기적인 특징은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 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점차 기술이 쇠퇴하여 조형이 단순하게 표현된다.
이상의 내용으로 고려시대 금강저의 용도는 당시 재난극복을 위한 '기양의례'의 의식구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