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이다. 정부를 비롯한 지자체, 기관이나 단체 등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고 그 의미를 알리기 위하여 사업회 혹은 위원회를 세워 여러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럴 때 기독교가 빠질 수 없다. 기독교는 사실상 3·1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였고, 교회나 기독교 학교가 중심에 서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퍼뜨렸다.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3~1.5%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의 형편은 완전 다르다.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매년 떨어지고 있다. 2019년 9월 예장통합 제104회 총회에서 명성교회 세습과 관련하여 수습안이 통과되고 난 후 언론이 지적한 것처럼, 이제는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과연 선교는 가능할까? 본 글에서는,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극복하며 그 까닭으로 평신도를 제시한다. 평신도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행 2:47)을 때에 비로소 선교는 가능하다.
본 글에서는 교회사에서 평신도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고, 그중에서 루터의 만인제사장론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1960년대 평신도신학의 등장과 발전의 의미를 따져본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평신도를 선교 사역의 주체이자 도구로 세우기 위하여 무엇보다 평신도의 소명의식을 확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평신도가 소명을 고백하며,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르게 살아갈 때 비로소 선교는 계속되고, 기독교인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