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현상학자인 장-뤽 마리옹은 『주어짐과 계시』(Givenness and Revelation, 2016)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계시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리옹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의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를 비롯한 네오-토미즘의 논의를 거치면서 계시의 초월적인 측면이 망각되고, 계시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으로 환원되었음을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계시가 지닌 '묵시(apocalypsis)'의 의미, 즉 '펼쳐 열려짐'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마리옹의 계시 논의는 철학 영역에서 이루어진 '주어짐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Givenness)'과 연관된다. 마리옹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주체의 지향성을 파악해내는 기존의 현상학적 논의를 비판하고, 주체의 지향성이나 인식으로 구성할 수 없는 현상을 주어지는 대로 파악해야함을 역설하였으며 그러한 현상들을 '포화된 현상(saturated phenomenon)'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포화된 현상이 가장 탁월하게 수행되는 것이 바로 '계시 현상(phenomenon of revelation)'이라고 지칭하였다. 이 계시 현상과 궤를 같이 하는 종교적 계시는 인간의 기대를 넘어서서 오는 포화된 성격, 그리고 그것이 주는 역설의 특징들은 계시가 돌아가야 할 묵시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마리옹은 그리스도교의 계시 또한 인간의 지평을 넘어서는 포화됨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그 계시의 정점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마리옹은 콜로새서 1,15에서 이야기하듯이 예수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아이콘"이라고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인 '아이콘(icon)'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가시성이 아니라, 그것이 재현하는 아버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포화된 현상으로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평을 넘어 완전한 역설로써 다가오기 때문이다. 육화되신 하느님인 예수를 직접 바라보면서도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역설이 가득한 이 계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가 필수불가결하다. 이를 통해 마리옹은 예수-성부의 아이콘적 구조에 성령을 추가하여 삼위일체적인 왜상(歪像, anamorphosis)의 모델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마주한 인간은 성령을 통해 예수 현상의 역설을 받아들이고, 예수 너머의 아버지의 형상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마리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 모델이 삼위일체적 방식으로 펼쳐 열려진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마리옹은 하느님께서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자기를 보여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는 삼위일체적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물론 이러한 마리옹의 계시 논의에 대한 몇 가지 비판점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그가 사용하는 '삼위일체적(trinitarian)'이라는 표현은 현상 그 자체에서 드러났다기보다는 교회가 예수를 직접 마주했던 사도들의 경험을 오랜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도달한 개념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마리옹은 자신의 삼위일체적 계시에서 '성령'은 자신을 선물로 주는 비가시성의 영역에 있다고 하는데, '성령' 또한 하느님의 한 위격으로 자신을 가시적으로 드러냄을 통해서만 삼위일체의 해석이 가능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여러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즉 계시가 공동체적으로 수용되거나 거부되는 것에 반하여, 마리옹의 계시 논의는 너무 개인적인 계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옹의 삼위일체적 계시 논의는 신학적 측면과 교회의 사목적 측면에서 많은 의미를 제시한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 「하느님의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 당신 자신(se ipsum)'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랑의 의지'는 마리옹의 현상학적인 '계시의 주어짐'에서 더욱 강조된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 계시의 정점이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이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그리스도 중심적 계시'의 측면 또한 공통점으로 살펴볼 수 있다. 나아가 마리옹의 이러한 현상학적인 계시는 신앙인들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인생의 중요한 경험들을 신앙의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특히 마리옹이 삼위일체적 계시를 마주한 인간의 변화를 '회심'이라고 했는데, 자신의 삶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어떤 사건으로 세상을 새롭게 마주하게 되는 이 체험은 삼위일체적 계시의 체험과 연계시켜볼 수 있다. 이러한 계시의 현상학적인 이해는 지금의 교회를 더욱 풍성한 나눔의 장으로 만들고, 실제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신앙의 실존적 결단들을 공동체의 것이 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사도들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것의 고백을 통해서, 그것이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의 체험이 되도록 이끌었던 초대 교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