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인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기술적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 기술은 인간을 위한 도구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사회적 · 문화적 구성요소로서 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침투한다. 전례없는 과학기술의 역사적 성취와 자본주의가 맞물린 거대한 톱니바퀴 안에서 인간과 기술이 혼재하는 가까운 미래사회의 청사진은 긍정과 부정의 양가성을 띤 관점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두 대칭점 사이에서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학제적으로 깊이 탐구하는 사유 체제의 장(場)을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라 명명할 수 있으며 이 시기를 '포스트휴먼 시대'라고 부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근간으로 하여 단일하고 견고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시도한다. '생각하는 자아'로서 정신, 이성, 자율성,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그'를 구성하는 전통적 휴머니즘의 이분법을 앞세워 인간 외의 종(種)을 타자로 밀어내고 유럽 중심의 지배적 패러다임의 주체로서 오랜 시간 군림해왔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자연, 동물, 기술적 존재 등의 비인간적 타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근대적 이원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대안적 주체를 제안하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신(新)인류의 등장을 기대한다.
공상과학영화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묘사하는 상상적 지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고정적 범주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술적 존재를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영화 속 기술적 존재는 인간을 욕망하고 부정하고 배척함으로써 전통적 인간 정의를 와해하고 재구성하고 있다. 기존에 인간과 기술적 존재를 다룬 영화에서 도출된 비인간의 인간화, 정신과 몸의 합일또는 분리, 여성의 한정된 역할, 신이 되기 위한 인간의 도전은 이분법의 내적 균열을 일으키는 포스트휴먼 주체 형성과 연관된 중요한 사유 재료를 제공해왔다.
〈그녀〉(Her, 2013)와 〈엑스 마키나〉(Ex Machina, 2015)는 포스트휴먼 주체 형성을 다루는 영화의 계보를 이어왔다. 〈그녀〉의 '사만다(Samantha)'는 도구적 목적에서 벗어나 한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개입하여 사랑의 대상으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이고,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Ava)'는 인간이 개발한 로봇으로서 튜링 테스트를 통해 자의식과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인정받은 현대과학기술의 집약체이다. 두 영화는 인간 남성과 여성 기계의 관계 설정의 공통점이 있었으며, '사만다'와 '에이바'는 생명의 정의를 확장하고 감성과 감정을 지닌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전복하는 실체이자 이성(logos)을 조롱하면서 남성과 여성 권력 구도를 전복하는 혼종적 행위자로서 등장하였다. 이들은 인간 중심주의의 체계에서 비정상의 반란, 경계 넘기, 제도 이탈, 영역 확장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포스트휴먼 주체로 나타났다.
본 연구는 인간과 기술적 존재의 관계를 서사에 담아낸 영화를 선정하여 기술적 존재의 정체성을 분류하고 관계 설정 및 양상에 드러나는 특징을 도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녀〉와 〈엑스 마키나〉의 기술적 존재가 휴머니즘적 인간 정의를 와해하는 포스트휴먼 주체로서 근대적 이분법의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에 주목했다. 현재 우리가 가고 있는 역사적 주체로서 포스트휴먼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비인간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자기반성의 방향 기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