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나눔의집이 현재 맞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정체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미래의 새로운 방향을 찾는 일 또한 정체성에 기초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나눔의집 구성원들은 나눔의집이 일반 사회복지기관이나 시민사회단체와 구별되는 정체성이 따로 있는지 묻곤 하였다. 그 대답은 언제나 '영성'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그 '영성'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막연하고 모호하였다. 이래야 한다, 혹은 저래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십인십색의 의견들만 난무하였다.
본 논문은 영성이란 삶으로 이미 체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즉 '영성'이란 '생활로 살고 있는 경험'(spirituality as a lived experience)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눔의집 영성이 이러저러해야한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생활로 실천되는 영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눔의집 사람들의 일상과 활동 밑바탕에는 생활화된 영성이 이미 잠재해 있다는 전제에서 본 논문은 출발한다. 그 잠재된 영성을 명료화하고 의식화하는 것이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그 과제를 수행하여 나눔의집에는 이미 그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합의할 수 있는 영성이 내재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전제에서 방법론이 나온다. 나눔의집 사람들의 일상과 활동 속에 이미 생활로 실천되는 영성이 내재해있다고 전제한다면 그것을 밝히는 일 역시 내부생활자들의 자기진술에 의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 외부의 어떤 관점이나 이론을 덧씌우기보다는 나눔의집 내부 구성원들의 진술에 기반하였다. 본 논문은 그러한 전제와 접근방식에 기초하여 나눔의집 사람들의 일상과 활동 속에 잠재해 있는 영성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영성이 그리스도교 영성, 특히 성공회 영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눔의집은 내부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실천을 펼칠 수 있었던 시기를 지나 정부와 지자체의 복지사업을 위탁받게 되면서 감독과 관리를 받게 되어 성과와 평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즉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상상력과 사회운동적 감각이 어우러진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적 비전'이 사회복지사업의 관점으로 대체되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나눔의집이 사회복지기관, 시민사회운동단체와 다른 지점이 무엇이냐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낳았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나눔의집은 어떤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다양한 모색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활동의 지속과 방향 및 정체성의 확립에 있어서도 영성이 바탕에 있어야 함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호적이거나 막연하고 모호한 양상을 띠어 왔다.
이러한 나눔의집의 혼란 속에서도 나눔의집에 몸 담았던 이들은 그들 나름의 영성을 찾고 구현하면서 살아왔다. 이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눔의집 사람들의 일상과 활동을 통해 암묵적으로 드러난 영성은 어떤 일치점을 갖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왔던 영성과 닿아 있었다. 더 나아가 성공회가 오래전부터 강조해왔던 영성과 닮아 있었다.
나눔의집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추구했던 영성은 사람, 일상, 기다림, 불편함, 연민, 어리석음, 내려감, 부서짐이라는 8개의 열쇳말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다시 성공회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왔던 일상, 육화, 사람, 여정이라는 4개의 열쇳말로 모아질 수 있었다.
성공회는 일상을 벗어난 거룩함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찾는다. 이는 신이 인간이 되셨다는 '육화'를 성공회가 중요시하는 데서 비롯되는 특징이다. 신이 인간이 되셨으므로 이제 인간을 우회해서 신에게 다가가는 길은 없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인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 신성에 다가간다는 건 하나의 '여정'으로서 성공회가 강조하는 바이다. 성공회는 한순간의 회심보다는 꾸준히 길을 가는 과정으로서의 수행과 실천을 강조한다. 나눔의집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강조한다. 이때 사람이란 사회복지 수혜의 대상이거나 관리의 대상이 아니다. 신이라는 절대타자 앞에 서면 그 앞에서 별 수 없이 자기부인, 자기비움이 일어나듯 만나야 하는 타자성이다. 그 '사람' 앞에서 우리는 '불편함'이라는 자아의 재앙을 감수해야 한다. 그는 내가 전문성과 지식으로 재단하고 계몽하고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려가고' '부서지는' 과정을 통해서 관계 맺어야 하는 타자다. 나눔의집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동정이 아닌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깊은 공감과 '연민'으로 그들 곁에 함께 하였다. 세상을 거스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진정한 지혜로 나아가는 '어리석은' 행동들을 함께 도모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기다리듯 가난한 이웃들 곁에 머물며 '기다렸다'.
이상의 모든 것은 '사람' 하나로 모아진다. '신이 인간이 되셨다!' 이제 눈앞의 사람은 신의 현현이다. 그와 맺는 관계가 신성과 맺는 관계이다. 그 '사람'을 우회해서 달리 찾을 수 있는 영성은 없다.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신과 함께 있는 길이다. 그것은 지난한 여정이다.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부단히 기다리고 어리석어야 하고 불편해야 하며 부서져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자기 비움이요 자기부인이다. 그가 누구든 나눔의집 사람들은 사람을 서비스 대상, 수혜자, 계몽과 관리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개별자, 자신만의 고유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로 보려고 했다. 그러한 태도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육화를 '신이 사람이 되셨다,' 고로 사람은 신을 대하듯 대해야 한다는 태도로 해석하는 것과 이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신성에의 협력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는 신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