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역사는 '남성의 업적'으로 재현되어 왔다. 여성을 부속적 존재로 기술하거나 여성의 존재 자체가 지워진 역사 속에서 여성의 역사를 쓰는 것은 그 자체로서 페미니즘 투쟁이다. 여성사는 남성중심적 역사를 바로잡고, 소수자에게 발언권을 준다. 특히 여성 운동 주체의 자기 역사 기록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내며 사회를 변화시켜 온 여성들의 이야기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기록의 정치'의 역할을 한다. 본 연구는 10년 이상 활동하고 단체 역사 자료를 펴낸 여성 단체가 만든 17권의 자료에 대한 문헌 분석을 통해 여성 단체 자기 역사 기록의 실천적 특징과 기록 전략을 살펴보았다.
연구 대상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여성 단체의 자기 역사 기록 작업은 목표 설정, 집필 과정, 기록 전략의 모든 측면에서 실천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체들은 역사 자료를 발간한 목적이 '운동으로서의 역사 쓰기'임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여성 운동 주체 부각, 단체의 비전 정립, 운동의 대중화도 자료 발간의 목적으로 드러나 있다. '역사 만들기'와 '운동 주체 부각하기' 방식은 단체의 운동 방식과 일치했다.
대상 자료들은 집단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단체의 역사 자체를 평가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재조명을 하는 치열한 과정이 집필 과정에 녹아 있었다. 내용 구성 방식은 크게 '종합적 정보 제공 방식', '단일 포커스 방식', '혼합 포커스 방식'으로 나눌 수 있었다. 자료 구성 방식은 단체의 정체성과 단체가 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를 보여 준다. 단체가 자기 역사를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재현할 때 어떤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단체들은 역사를 회고하며 운동의 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동학(dynamics)으로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변화, 여성 운동 제도화 성과와 그 이후의 운동 조건의 변화를 꼽고 있다. 반세기 이상 운동을 해 온 단체들은 '21세기로의 돌입'을, 민주화운동과 운동의 궤적을 함께 해 온 진보 여성 운동 단체들은 법제도화 운동이 성과를 거두며 진보 여성 운동이 힘을 받던 흐름에 신자유주의와 보수 정권의 회귀가 제동을 건 2000년대 전후 시점을 주요한 사회 변화 기점으로 꼽고 있다.
단체의 자기 기록 전략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운동에 대한 자기 평가를 기술한 부분이다. 단체가 제시하는 성과와 한계, 전망과 과제를 통해 단체가 추구하는 위치성과 정체성을 읽을 수 있다. 자료에서 나타난 단체들의 정체성·위치성은 한국 여성 운동의 선구자 혹은 대표자, 사회 변혁의 주체, '차이의 정치'의 주체, 의제 전문가로 나눌 수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 여성 단체의 자기 역사 자료는 기존의 성맹적(gender-blind) 역사를 바로잡는 젠더사의 자료로서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 단체가 자기 역사를 기록화하고, 기록을 확산하기 위해 필요한 공적·사회적 지원에 대한 적극적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