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경주 황남동 일대 소형 석곽묘 등에서 다량 출토되어 문화적 특성을 드러낸 신라 토우에 관한 연구이다. 경주지역의 40개 유적에서 출토된 451점의 토우를 정리하여 시대와 유적성격에 따른 토우의 종류와 변화상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신라 토우는 시기적으로 7세기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먼저 5세기 중후반~6세기 대에 제작된 토우는 5㎝ 내외의 크기로서 토기에 부착된 형태이다. 인물 토우의 경우 신체의 특정부위를 과장하고 나머지는 생략하였으며, 가무, 잡기 등의 표현이 두드러진다. 동물 토우는 포유류, 어류, 조류, 갑각류 등 다양한 종류가 제작되었다. 왕릉급 대형무덤의 매장주체부에서는 출토 예가 거의 없고 주로 중·소형의 적석목곽분과 석곽묘에서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출토된 이른 시기 토우는 인간의 일대기를 표현한 것으로, 일상생활중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특히, 장례의식 장면을 표현한 것은 사자의 혼을 위로하고 부활을 기원하며, 저승에서도 영생을 기원하는 소망의 표현으로 해석하였다.
7세기 이후 신라 토우의 종류와 형식, 제작기법, 용도 등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긴 것으로 파악하였다. 크기가 10㎝ 이상의 독립형으로, 인물 토우의 경우 신체의 특정부위를 강조하였던 형식은 사라지고 양손을 모아서 예를 표하는 모습 등으로 변화하였다. 동물 토우의 경우 어류, 갑각류 등은 소멸되었으나 기마인물형 토우와 마형 토우의 양은 증가되었다. 그리고 제작기법에서도 소성 시 터짐 방지를 위해 가운데를 비운 중공(中空) 형태로 변화되었다.
아울러 고신라 토우는 신에 대한 원시적인 기원이나 주술적인 목적을 내포한 무덤부장품으로 매납되었으나 7세기 이후에는 다양한 용도로 변모하였다는 점이 부각된다. 첫째, 순장대용품으로 피장자에 대한 시봉자의 개념인 토용으로 변화되었다. 둘째,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우와 마형 토우는 제의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토기에 부착되었던 초기형식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불교의 상징적 표현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도입과 성행으로 골호로 변화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 이후 토우의 이러한 변화요인은 불교 신봉에 따른 무덤의 축소와 장례문화의 간소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횡혈식석실분의 축조와 화장제도의 보편화에 따른 골호의 등장이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토기 제작기술의 발달과 지증왕의 순장금지(502년), 법흥왕의 율령반포(520) 등 관습법에 따른 사회가 아닌 법령의 규제를 받는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토우도 변화된것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