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조선 후기 민간에서 제작된 제사도의 종교적 성격과 기능에 대한 연구이다. 종래 이들 그림은 '유교식 제사'를 위한 그림으로서 감모여재도로 통칭되었다. 그러나 이들 제사도 중에는 유교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제사도를 그 종교적인 성격과 기능에 따라 불교적인 방식의 원당도와 유교적인 방식의 감모여재도와 영위도로 구분하였다.
제사용 그림의 제작은 고대 이래 계급 차별적 성격이 강했던 제사에서 신분제한적 요소가 사라지자 민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18~19세기 동아시아 민화의 한 흐름이기도 하다. 조선의 민간에서도 조상제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이를 실천하기 위한 여러 대안들이 생겨났는데 그 중 하나가 제사용 그림의 제작이다. 1914년 발간된 이마무라 도모(今村병, 1870~1943)의 『조선 풍속집』에 보면 "가난한 자는 베로 신위를 만들고, 또한 너무 가난한 자는 지방(紙榜)을 이용하여 병풍 혹은 돗자리에 붙여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듯, 1934년 조선총독부 제정의 『의례준칙(儀禮準則)』에서도 독(櫝)에 지방을 붙여 사용하거나 독도 없을 경우 병풍이나 백지류에 지방을 붙여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신주의 대체 방식으로서 지방(紙榜)의 등장은 그것을 붙이기 위한 바탕으로 원당(願堂)이나 사당(祠堂), 교의(交椅) 등을 그리는 제사도 제작의 동기가 되었고, 수요를 창출시킨 것으로 보인다.
불교식 제사는 고려시대 이래의 오랜 전통적인 제례 방식이다. 또한 조선 초기 왕실의 발원으로 시작되었던 수륙재와 같은 천도의식이 민간에서 보편화되면서 불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원당도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작품들은 원당 건축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이는 『조계산송광사사고(曹溪山松廣寺史庫)』나 『정조실록』즉위년 기사에서 보듯이 당시 원당이 명산대찰과 각도의 사찰에 퍼져 있어서 일반 대중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개념이었고 자신들 또한 왕실과 마찬가지로 선조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그림으로나마 원당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유일하게 화기가 있는 미국 브루클린박물관 소장의 원당도가 원당의 설립이 가장 왕성했던 영정조 시대를 지나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연간인 1811년에 제작되었다는 점은 여러 시사점을 갖는다. 원당의 건립 목적과 마찬가지로 원당도 역시 조상뿐만 아니라 유교 제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특별히 위무가 필요했던 사람들에 대한 제사 용도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원당도란 "조선 후기 제사그림 중 위패의 배경에 불전이나 불교식 재단과 함께 불전을 그린 것으로, 망자에 대한 추선공양(追善供養)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인 것이다.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는 원래 화제가 붙어 있었던 그림과 그 변형된 형태의 그림들에 국한된 개념으로, 오구족(五具足)의 재단과 함께 전각이 그려지거나 전각만을 그린 것, 전각과 민화의 다른 제재들이 결합된 형식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제작되고 있는데 당시 급격한 사회질서의 변동 속에서 유학적 명분론이 설득력을 잃고 개인의 안녕만을 중시하던 사회풍조를 반영한 듯 도상에서 유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정통적인 유교식 제사를 표방하기 보다는 민간의 기복신앙이 어우러진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영위도(靈位圖)는 의식의 점진적인 간소화와 함께 제사 그림 역시 그 도상이 간략화 되면서 교의에 집중된 형태로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구를 갖출 수없었던 상황에 대한 대체물로서 제례의 용도만이 아니라 상례의 과정에서 빈소에 갈음하는 상징성을 지니고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사도 제작의 초기 형태는 불교적인 성격의 원당도이다. 원당도에서 점차 유교 제사적인 요소가 시도되고 불교적 요소는 점점 사라지면서 유교적인 방식으로 변화되는 전개 양상을 보인다. 제사도는 불교에서 점차 유교적인 방식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유교적인 내용과 민화적 표현의 점증'이라고 하는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작품의 크기나 표현 기법, 색채 사용 등에 있어서 초기 형식보다는 점차 대중적이고 저렴한 방식들이 시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서민 계층으로 유교식 제사가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당도를 모방하여 유교식으로, 좀 더 민화적으로 변용된 형태가 감모여재도이고 이것이 서민층에 널리 보급되고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제사도를 통해 본 서민 제사의 모습은 대체로 보수적이며 불교적인 전통성이 강하다. 원당도의 존재로 알 수 있듯이 유교를 받아 들인지 400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불교식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서 유교로의 전환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원당도의 불교적 요소들이 거의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감모여재도와 영위도가 제작되고 있어서 유교가 새롭게 서민 제사의 한 방식으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