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를 국가폭력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그 특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기존의 많은 부랑인 관련 연구들에서는 1960년대 이후 군사정권기의 부랑인 정책의 폭력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그에 앞선 국가형성 초기 단계(2차 세계대전과 해방, 한국전쟁과 1950년대)의 경험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은 소홀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국가폭력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시기로, 부랑인 정책의 폭력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1950년대를 중심으로 한 경험의 상대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군사정권기까지의 부랑인 강제수용 정책의 변화 및 그 특성을 추적하고자 한다.
외국의 역사에서도 '부랑인 강제수용'의 대상 집단은 명확히 거리에서 부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보다 범주가 넓은 빈곤층 일반이었다. 국가권력은 이 광범위한 빈곤층 일반을 범죄적 속성을 담지한 집단으로 보고 폭력적으로 단속하는 경향을 보여왔는데,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에 따라 단속과 수용의 양상은 차이를 보인다. 영미권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부랑법(vagrancy law)은 일군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통제해 노동자로 훈육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반면, 파시즘/식민지 국가의 부랑인 통제정책은 부랑인을 바람직한 국가/국민 형성에 방해되는 오염 요소로 인식하고, 이들을 우생학적 방식으로 분류해 배제하고자 하는 특성을 지닌다.
한국의 부랑인 강제수용 또한 식민지 경험과 두 차례의 총력전(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경험의 영향으로, '부랑인'이라 지목된 자들을 선량한 국민성을 오염시키는 존재로 인식하고 비국민화하는 경향을 띤다. 이는 '빈곤을 범죄화'하는 국가의 시선이 반영된 것이면서, 또한 부랑인을 국가의 안전을 사회 내적으로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국민 내부를 위계화하고 특정한 집단을 '적-빨갱이'로 몰아넣는 국가안보 담론 및 그 실천과 대당하는 것으로, 본 연구에서는 이를 사회 내적으로 자생하는 '적(敵)'의 차단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안보'라 규정하였다.
각 시기별로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식민통치에 순응하지 않는 일군의 청년층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랑법이 활용되었지만, 1920년대 이후 농촌수탈정책으로 인한 도시 부랑인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감화원 제도가 정착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감화원은 부랑아를 전시동원체제에 복무할 인력으로 양성하기 위해 활용됐는데, 이는 부랑아를 체제 내로 '강제적 포섭'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해방과 한국전쟁의 여파로 전재민·피난민이 급증했고, 이로 인해 부랑인의 규모도 늘어났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일제강점기 때와는 달리 국내 산업 기반의 붕괴로 부랑인을 포섭할 물적 기반이 사라졌고, 전선(戰線)이 한반도 내로 이동해 국내의 유동하는 인구에 대한 권력의 불안, 감시 및 통제에 대한 욕망 또한 더욱 심해졌다. 따라서 부랑인에 대한 국가의 대응도 '강제적 포섭'보다는 '강제적 추방'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담론의 차원에서 보자면, 해방 후 '부랑(浮浪)'이란 단어는 전쟁과 빈곤으로 인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도덕적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국가체면을 훼손하고 사회 내적 치안을 위협하는 사적 폭력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또한 미국에서 수입된 정신의학·심리학 등의 영향으로 부랑아는 정신박약, 정신이상의 존재로 개념화되었고, 구호정책을 통한 생계지원 대상이 아니라 처치 곤란한 '잉여' 또는 '사회적 폐기물'로 취급되었다. 게다가 지식인·엘리트층은 4·19 당시 부랑인을 포함한 도시하층민의 거리 시위 참여를 혁명 정신을 훼손하는 '폭동'으로 보고, 부랑인 단속을 선제적으로 요청하는 여론을 형성한다. 이런 인식은 쿠데타로 권력을 획득한 박정희 군사정권으로 이어졌고, 박정희 정권은 거리의 부랑아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집행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실천의 결과 만들어진 부랑인 수용소 사례 분석을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이곳에 수용된 원생 중 다수가 일선 경찰 등의 실적 위주의 단속에 걸려 연고자 및 주소지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부랑인이라 지목되어 끌려왔고, 퇴소 과정에서도 아무런 대책 없이 방출되어 다시 부랑의 삶으로 내몰렸다. 즉, 수용소는 사실상 이들의 사회적 존재를 소거시키는 역할은 한 것으로, 사회적 존재의 소거는 수용소에서 죽은 원생들이 암매장되었다는 사실에서 완성된다. 또한, 이들의 삶은 폭행과 굶주림, 과도한 규율, 강제노역으로 점철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정권이 내세운 '산업전사로의 갱생'이라는 목적과 상반된 것이었다. 수용소 안에서의 노동은 비효율적이고 쓸데없이 과도한 폭력이 자행되어, 사실상 수용 원생들을 비인간화하고 박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우리는 한국 근대국가 형성과 비국민화의 계보 속에서 부랑인으로 표상되는 도시하층민이 점하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의 파괴적 양상으로서 부랑인 수용소의 폭력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