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문인화가 도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고려시대 중엽이지만 아쉽게도 이 시기의 문인화에 관한 흔적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문인화는 사대부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조선 초기의 문인화는 중국 사대부들의 문인화와는 대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문인화의 경우 元代에서부터 전업 작가가 속출하기 시작하여 明代에서는 賣畵가 성행하였고, 淸代에 와서는 양주팔괴 등의 등장으로 전문화가 집단이 본격적으로 활동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문인 신분으로 그림에 주력하는 행위가 賤技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일반 화공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문인화는 餘技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문인화라는 개념 안에 있는 사군자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 후기로 파악된다. 조선 중기의 문인 화가들이 다양한 화목으로 소재를 삼은 반면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를 거친 화가들은 사군자로 범위를 축소하여 그림을 그렸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 활동해야만 하는 선비 문인들의 표현의 자유가 억제당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군자 중에서 '竹'을 소제로 삼은 묵죽화는 문인 사대부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죽'은 사철 푸르고 부러질망정 휘어지지 않는 특성이 있어 강직한 선비 정신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묵죽화를 잘 그렸던 화가로는 중국에는 북송대의 문동과 소식이 있고, 원·명·청대에는 이간, 조맹부, 서위, 정섭 등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묵죽화가로는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인 이정, 오덕장, 신위 등이 있다. 조선 말기에는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문인 화가 성행하면서 서예성과 사의성이 강조된 문인화풍의 그림이 출현하였다. 구한말 장승업을 마지막으로 전통화단은 퇴조를 보였지만 근대 화단의 경향은 후진 양성과 문인화의 전통적인 맥을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만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화풍을 답습하기에 급급했던 우리나라는 한국적인 화풍을 창출해 내지는 못하였지만 유학과 여행 등을 하면서 중국화단과의 교류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해방 후 일제 강점기에 그림을 배운 화가들의 문제점 등으로 교육 기관에서는 인재 양성이 시급하여 대학교에 미술학과를 설립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9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약칭 '국전'이 새롭게 출발하고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 3회에 분리 되었던 사군자가 서예에 다시 병합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회적으로는 강력한 군사정권의 시기였으므로 창작활동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지만 미술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민간 주도의 전람회인 民展 형식의 공모전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 '국전' 23회에 사군자가 서예에서 독립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서예에 포함되었고 사군자와 문인화는 구분 없이 같은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이무렵 국전의 폐해가 날로 심해지고 미술계에서는 계몽의 의지가 속출하면서 1981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이 민영화되었다.
오늘날 문인화는 저변확대와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인의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양성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다다랐다. 이에 2000년 사단법인 미술협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서예분과에서 문인화분과가 분리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은 문인정신이다. 현대의 문인화는 선비정신의 결여는 물론이고 중국의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기술적인 측면에만 치중하는 나머지 정형화된 그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 창작을 중시하는 법고창신의 문인화로 거듭나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