顧堂 金圭泰(1902~1965)는 朝鮮儒學史의 大賢인 寒暄堂 金宏弼선생의 13대 후손으로서 대대로 전형적인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민족에게 통치 받는 암울하던 시기와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이 일어났던 근대사의 혹독한 시대 속에서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학자로서의 교육을 받았으며, 1927년 26세에 스승 栗溪 鄭琦(1879~1950)를 따라 전남 구례로 이거하였다.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제생들에게 한학을 교육하는 것과 예술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시 鄕儒들은 앞을 다투어 從遊하려고 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지기인 惟堂 鄭鉉輻(1909~1973)과 함께 명필로 널리 소문이 났다. 이 시기에 세인들의 존경과 명성이 높았으며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특히, 전라도와 경남 일대 묘소의 비문 글씨나 누정·제각의 현판은 거의 고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당의 학문은 오직 옛 성현의 뜻을 오롯하게 실천해 보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의 학문세계는 크게 청년시절, 스승을 따라 구례로 이거한 20대 후반과 스승 율계의 후학을 양성하라는 命을 받들어 35세(1936년) 되던 해에 장천재의 강수당 등에서 많은 후학을 30년간 지도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당은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몸소 체득했기 때문에 오직 바른 마음과 청렴한 몸가짐 그리고 공평한 일처리와 검소함과 부지런함이 우리 인류를 행복하게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스승의 권유에 따라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면서, 호남 지역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광주 촌이 형성 될 수 있었다. 그만큼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고당의 서예관을 세 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첫 째는 임서를 통한 법고사상을 기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왕희지·안진경·구양순·미불·황정견 등의 법첩을 임서하였으며, 많은 임서를 통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자신의 흉중에 담고자 노력하였다.
두 번째는 학문과 예도가 혼연일치하는 文藝一體이다. 고당의 학문적기지에는 도덕적 수신을 탄탄하게 깔고 그 위에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더하고 나아가 시·서·화를 체질화하여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인간이 되고자 하였다.
세 번째는 心正則筆正이다. 이 말은 서예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사상·감정·정서를 그대로 표현해내는 예술로써, 오랜 시간동안의 숙련과 학문적 연마가 겸하며 작품에 임할 때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한 후에 글씨를 쓰고자 하였다.
위와 같이 고당은 한학을 기본으로 하여, 서예의 근본을 다지고 예술에 대한 폭 넓은 탐구와 글씨에, 유학 정신을 담아 독자적 학문과 글씨를 완성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