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과 중국의 국공내전에 대해서는 많은 분석이 이루어졌지만 1930년대 후반 만주지역에서 그 어느 조직보다 치열하게 항일전을 전개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편이다. 과연 동북항일연군은 어떤 조직인가? 일제강점기 조선과 중국의 독립을 위하여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그리고 동북항일연군은 관동군에 맞서 어떠한 방식으로 항일전을 수행하였는가? 동북항일연군에 관한 연구에 있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하는 시도로 본 논문은 첫 발을 내디뎠다. 특히, 군사학적 입장에서 '동북항일연군의 항일전 수행방식'은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 본 논문은 연구를 시도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에 창설하여 소련으로 월경(越境)하여 1942년 동북항 일연군 교도려(제88여단)가 창설된 후, 1945년 8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할 때까지 만주 일대에서 항일전을 수행했던 '抗日軍'이다. 동북항일연군이 창설되기 전 만주에는 여러 지역에서 각각 활동하던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유격대가 있었으며 이러한 항일유격대는 중공의 1월 서한과 8·1선언 및 건제선 언에 따라 일련의 과정을 거쳐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성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을 대상으로 한 선행연구를 분석한 결과 연구대상이 동북항일 연군이라는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이 되어야할 핵심적인 내용인 동북항일연군의 군사목표, 군사전략 및 전술 등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항일전 수행방식과 투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찰하여 동북항일연군의 항일전 수행방식을 이해하고 각 시기마다 그것이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자료의 신뢰성과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다음의 중국 자료를 주로 활용하였다. 첫째,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이자 후일 동북항일연군의 후신인 제88여단의 여단장을 역임한 주보중의 일기인 周保中, 『東北抗日遊擊日記』(北京: 人民出版社, 1991)이다. 둘째, 중국이 동북항일연군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연구한 산물로써 자료의 신빙성이 높을 뿐 아니라 본 논문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동북항일연군의 항일전 전투사례'사료가 풍부한 東北抗日聯軍史料編寫組, 『東北抗日聯軍闘爭史』(北京: 人民出版社, 1991)와 常城·李鴻文·朱建華『現代東北史』(吉林: 黑龍江敎育出版社, 1986)이다. 그리고 동북항일연군이 활동하던 시대의 각종 통계자료의 인용은 中國第二歷史檔案館·吉林省社會科學院, 『日本帝國主義侵華檔案資料選編 : 東北 "大討伐"』(北京: 中華書局, 1991)을 활용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항일 전 수행방식은 일본의 만주점령정책인 치안숙정공작의 강도에 따라 그 형태가 변하였다. 먼저, 1936년부터 1937년 말까지는 일본의 치안숙정공작이 군사토벌 위주이며 이 또한 기민하게 이동하는 동북항일연군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은 관동군에 비해 국부적 우세를 점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 시기 동북항일연군의 항일전 수행방식은 對토벌 분쇄작전 및 홍군과의 연계를 위한 전략적 서진 등이 있다. 다음, 1938년부터 1941년까지는 일본의 치안숙정공작이 치표공작(군사 토벌 및 귀순공작), 선전공작, 치본공작(비민분리정책, 집단부락공작)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운용하였으며 동북항일연군의 유격구에 집중적으로 실시하여 동북항일연군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마지막으로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북항일연군의 항일전 수행방식은 '잠재기' 또는 '준비기'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 초부터 관동군은 만주지역의 동북항일연군을 초토화시키기 위하여 大토벌을 전개하였는데 동북항일연군은 중과부적의 적에 대적하여 전투력을 소모하기보다는 전투력을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을 투쟁전략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으로 월경하여 소련극동군 산하의 제88여단으로 활동하며 만주지역의 정세가 동북항일연군에게 유리해지길 기다리며 전투역량의 향상을 위하여 군사훈련에 매진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북항일연군의 항일전 수행방식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북항일연군의 창설 초기(1936~1937)에는 일본의 치안숙정공작이 효과적으로 발휘되지 못하였다. 첫째, 이 시기에는 일본의 치안숙정공작이 치표 공작(군사토벌)에만 치우쳐 있어 유격구를 계속적으로 이동하는 동북항일연군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어려웠다. 둘째, 군사토벌이 미진한 가운데 일본이 추진한 집단부락 건설 역시 효과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북항일연군이 집단 부락 건설현장을 공격하고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동 시기의 관동군의 병력 수는 2개 사단에 불과하여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에 큰 제약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환경에서 동북항일연군은 국부적 우세를 달성한 가운데 관동군의 토벌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對토벌 분쇄작전' 을 실시하였다. 또한 홍군의 동정작전에 호응하기 위하여 전략적 차원에서 서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동북항일연군이 대토벌 분쇄작전을 구사한 목표는 일본이 건설한 집단부락을 파괴하여 관동군의 토벌작전을 와해시키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집단부락을 통한 비민(匪民)분리' 라는 목표 달성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의 서진은 첫째, 만주국 및 관동군의 활동으로 단절된 동북항일연군 각 군 간의 연결 및 각 항일유격 근거지간의 연계를 도모하기 위한 시도이며, 둘째, 중공중앙과 관내의 홍군 및 각지의 항일부대와의 연계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은 서진을 통하여 일본의 토벌공작에 대응하여 항일무장역량을 보존하여 일본의 통치 영향력이 적은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를 구축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일본의 치안숙정공작이 대폭 강화(1938~1941)된 시기에 동북항일연군은 창설 초기와 같은 우세한 형태의 항일전 양상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1938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제3기 치안숙정공작'이 안정화 궤도에 오르면서 치안숙정공작은 동북항일연군에게 강한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치표공작에서 군사토벌 외에 귀순공작을 강화한 것은 동북항일연군 내부 구조의 와해를 야기하였다. 또한 치본공작에서 집단부락공작의 강화는 동북항일연군과 민중과의 접촉을 단절시켰고 이는 결국 동북항일연군의 외부 구조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상황에서도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강력한 대토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은 유격근거지를 이동하는 기본적인 투쟁전략을 유지하면서 세부적인 전술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즉, 당시 거세진 관동군의 치안숙정공작(치본, 선전, 치표공작)으로 동북항일연군은 첫째, 소부대 중심의 많은 작은 승리의 축적을 통해 관동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전술로 관동군의 대토벌에 대항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즉, 관동군과의 결전은 회피하지만 도처에서 관동군을 교란하거나 습격하는 동시에 후방에서 폭파나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서진 형태로 나타나는 유형의 전투수행방식은 '적진아진(敵進我進),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적진아진을 통해 종래의 항일 근거지에만 집착하지 않고 관동군 점령지의 다른 곳으로 진입해서 새로운 근거지를 수립해 나감으로써 지속적으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셋째, 일·소 국경충돌 발생 이후 일본의 치안숙정공작은 더욱 강화되었다. 1938년 초반이후 일본의 집단부락을 위시한 비민분리공작으로 동북항일연군의 활동공간은 더욱 축소되었고 일본의 귀순공작으로 동북항일연군의 다수가 투항하거나 배신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에서 항일전을 수행하기가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더욱이 760,000여 명의 관동군에게 1,500여 명의 동북항일연군이 대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즉, 관동군의 의도대로 만주에서 계속적으로 마찰에 노출될 경우 동북항일연군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었다. 이에 동북항일연군은 활로를 모색하고 생존을 위해 소련으로 월경한다. 이 시기 동북항일연군의 전략은 "생존"이었다. 관동군과의 마찰을 피해 항일무장투쟁역량을 회복한 후 후일을 도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42년, 동북항일연군은 소련 극동군 산하 제88여단으로 재탄생하게 되고 소련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 시기의 항일전 수행방식은 실재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없었지만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자신들의 칼날을 갈고 있는 '준비기'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