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헤겔의 사변적 자연철학 내에서의 자연관과 인간관을 고찰함으로써 헤겔 철학이 다윈의 진화론적인 사고와 공유하고 있는 점이 무엇이며 동시에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동물과 인간의 근원적인 차이를 헤겔철학이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서 본 논문에서는 헤겔 철학, 특히 그의 주저인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자연과 정신의 개념을 고찰하며 진화론과 연관된 헤겔의 자연관과 인간관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헤겔의 진화론적 사고에 따른 자연관과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진화론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진화란 생명체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종이 변화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진화의 개념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부터 정착되기 시작했는데, 진화론은 자연선택설을 핵심 메커니즘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형질적 특성과 도덕성까지도 동물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후대 사회생물학자나 진화생물학자들도 이러한 다윈의 설명을 수용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포괄적응도 이타주의나 호혜적 이타성 등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와 달리 헤겔은 진화론적 사유를 전제로 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인간본성에 접근한다. 헤겔의 자연관과 인간관은 『정신현상학』 「이성」 장에서 자세히 논의되는데, 이성은 헤겔에게서 관찰하는 이성과 행위하는 이성으로 나뉜다.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자연을 관찰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인간은 행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세계란 따라서 인간 행위의 결과이자 작품이다. 관찰하는 이성과 행위하는 이성을 통해 우리는 헤겔의 자연관과 인간관을 엿볼 수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존재로서의 본래적 의미를 가진다. 자연적 존재의 특성은 관찰하는 이성에 의해서 밝혀지고 정신적 특성은 행위하는 이성에 의해서 드러난다. 인간은 그의 원초적인 자연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연성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헤겔은 그 이유가 인간의 본질이 정신과 자유와 행위에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이러한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이념적 세계인 문화, 법, 예술, 철학, 종교 등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헤겔은 이러한 이념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세계가 동물들의 세계와 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역설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법/국가의 영역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진화생물학자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헤겔의 인간관은 인간이 동물과는 다르게 이념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집단선택 안에서 인간과 동물의 사회성을 동일한 진화의 산물로 파악하면서 윤리학의 기원이 동물의 집단선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그들은 집단선택이 공동체성과 연결되기 때문에 동물과 인간의 공동체성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헤겔은 인간의 공동체란 정신의 영역이 포함된 이념적 특성을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동물의 공동체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집단선택에 따른 동물의 공동체는 사회성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 공동체인 반면, 인간의 공동체는 역사성을 바탕으로 인간이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인위적인 공동체이다. 헤겔은 이러한 공동체의 모델을 자유이념을 기초로 한 서양 근대의 법적 공동체/국가에서 발견한다. 헤겔은 근대의 법적 공동체가 개인권이 강조됨에 따라 몰락하게 되는 고대 자연 공동체로부터 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자연적이면서 인위적인 공동체의 형성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이 진화론적 특성에 기초한 자연적이고 동물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이러한 자연적 특성을 초월하는 정신적인 본성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인간은 바로 이념, 더 자세히 말해 자유이념을 반영하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