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전통적 속죄론, 대속론, 구원론과 연계돼 있는 그리스도교의 케노시스(성육신, 자기 비움, 자기 낮춤, 겸손, 자기 비하)를 가지고 레비나스의 전체 작품을 보려고 했다. 레비나스는 케노시스라는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에만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에서 케노시스라는 개념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것을 구약과 탈무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공통점을 케노시스로 보고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케노시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화된 속죄론을 넘어 모든 사람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레비나스가 암시하는 대로 케노시스를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포괄적 케노시스는 그것을 위한 언어적 장치다. 다시 말해 필자는 케노시스가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위해 살고 죽는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내가 이렇게 전통적 속죄론을 넘어 포괄적 케노시스를 가지고 자기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자아와 종교, 신론, 교회,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생태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AD 4세기 이후로 국가 종교가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낮춤의 사상을 제거하고 성공과 영광, 승리의 신학과 신앙을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신앙과 구원을 존재론과 연계시켜 이해한다. 이런 신앙은 존재론을 은총의 이기주의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은총에 대한 감사는 있어도 감사드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는 자취를 감추었다. 존재에는 관심하지만 타인과 타자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다. 타자에 대한 망각 때문이다. 설사 우리가 존재론을 극복하기 어렵다 해도 타인과 타자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타인과 타자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의 존재를 끝없이 비우는 케노시스는 곧 존재와 다르게이고 무한 책임이다. 그렇다고 케노시스가 정의과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케노시스는 비대칭성과 상호성을 동시에 연계시킨다. 정의 이후의 자비, 자비 이후의 정의. 자비와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케노시스다. 내가 순간 순간 죽어야 정의에 눈뜨고 자비로 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