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스피노자의 ‘다중’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존재론과 윤리학, 정치학을 검토하고, 그것이 민중신학과 관련하여 갖는 의미들을 탐색하려 한다. 스피노자에 게 있어서 신과 세계는 분리되거나 구분될 수 없는 일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신즉 실체는 세계의 수많은 양태들로 무한히 많은 방식을 따라 표현된다. 또한 신의 양태인 각 개체들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자들이 아니라 항상 관계 속에서, 관-개체로서 존재한다. 각각의 개체는 관계 안에서 변용됨/함으로써 신의 능력의 일부인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표현하며 실존한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라고 부른다.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이 코나투스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모든 개체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각 개체가 자신을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개체와 합력하여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이 개체는 ‘다중’으로 나타난다. 각각의 다중이 자신의 코나투스에 입각하여 공통-되기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능력의 증대를 체험하고 능동적인 존재로 변용하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의 ‘민주주의’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통-되기의 정치학을 통하여, 위로부터 초월적 규범에 의해 성립되는 권위주의적 국가의 형상이나, 자연상태의 각인이 자신의 능력(자연권)을 양도하는 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자유주의적 국가의 형상을 폐기한다. 스피노자는 다중의 민주주의야말로, 모든 다른 정치형태의 존립을 근거지우는 절대적인 통치라고 주장한다.
한편 스피노자는 이러한 다중의 공통-되기를 가로막고 다중을 항구적인 수동적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당시의 종교에서 찾았다. 종교는 다중으로 하여금 초월적인 신에 대한 상상 속에서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종교적 상상력이 다중들로 하여금 공통-되기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종교는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상상의 체계이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많은 신화와 역사 서술을 담고 있지만, 그 대의는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공통-되기의 윤리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선용을 위해서는 신앙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했다. 각 개인이 자유롭게 신앙적 상상력을 갖고 이웃과의 유대를 나누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가 생각한 ‘보편 종교’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사상은 민중신학의 존재론적 측면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민중신학은 그동안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으로부터 예수와 민중, 하느님과 민중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궁극적인 구원과 지금 이 자리에서의 정치적 해방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구원론에 있어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받아 왔다. 그러나 이것은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그것을 곧 비판의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극복하려 한 것이 바로 그런 주객도식과 존재의 양의성 위에 세워진 서구 신학의 구원론이었기 때문이다.
신과 세계, 신과 다중(민중)이 주체와 객체로 구별되지 않는 물(物)과 공(公)의 존재론을 통해 민중신학은 어떤 초월적 구원자가 아니라 민중 스스로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민중신학은 “민중 사건이 곧 예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 하나의 결정적이고 유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 사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개념을 폐기한 것이었다. ‘예수 사건’이라는 이름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민중의 해방사건,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다중의 공통-되기의 사건을 신학적 상상력의 언어로 포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존재론에서부터 구분된다.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대상인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속에 ‘구원사건들’이 있는 것이다. 구원사건은 수없이 일어나고, 또 그 구원사건들은 서로 소통하고 촉발한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과제는 하나의 구원론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구원의 사건들을 발견하고 증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 대의와 주권을 넘어 스스로를 구성하는 다중의 민주주의를 신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론 속에서 우리는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다중의 민주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나 체제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다중의 자기-초월의 실천, 예속적인 통치를 넘어서서 공으로 나아가는 다중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촛불집회는 이러한 다중의 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대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며 솟아오른 구원 사건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