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폭스(Matthew Fox)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과학시대에 적실한 새로운 기독론적 패러다임일 뿐만 아니라 생태계 위기에 처한 현 세대에 대한 기독교의 응답이다.
신학은 언제나 그 시대정신과의 대화를 통해 그 시대에 적절한 언어와 개념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달해왔다. 초기교회에서는 플라톤의 철학을,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근대에는 데카르트의 인식론과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과의 대화를 통해 신학을 구축해왔다. 즉, 인식론의 철저한 이분법적 구분과 존재론의 이원론적 구별이며, 아울러 기계적이며 정적인 세계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서구세계의 정신사를 지배했으며, 그리스도교 신학 역시 여기에 편승하여 신학적 논리를 만들어 왔다. 결국 이러한 존재론과 인식론은 ‘하나님과 자연’을, ‘인간과 자연’을 기계적으로 구별하고 구획해버리고 말았다. 자연은 사유의 능력이 부재한 열등한 객체이며, 사유할 수 있는 인간만이 지구의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더욱이 그리스도교 창조론의 전거라 할 수 있는 창세기의 문화명령인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구절은 자연에 대한 착취와 파괴를 정당화하는 증거본문으로 오용(誤用)되어 왔다. 결국 여기에서 인간중심적인 창조론과 신학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탈 근대 시대에서는 이러한 철학사상과 고전적 과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즉,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세계는 결코 존재론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 세계는 결코 정적인 세계가 아니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며 서로 관계의 그물망을 맺고 있다는 새로운 이해가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제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적인 신학은 여기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린 화이트를 중심으로 다수의 생태론자들이 비판하듯, 생태계 파과의 원인 제공을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적절한 응답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대해 메튜 폭스는 그 동안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탐구에서 제외시켰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의 모티프(motif)를 발견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론’(Cosmic Christology)을 제시한다. 더욱이 그는 여타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복음서를 중심으로 그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전거가 복음서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구약성서와 외경, 그리고 바울서신에서도 풍성한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근거들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다가오는 세대에 적실한 기독론 패러다임은 역사적 예수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론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야 과학시대에 적실한 기독교적 응답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라는 오해를 풀 수 있다고 본다. 그가 주장하는 우주적 그리스도란 말 그대로 인간의 구세주만이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의 구원자다. 우주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건만이 아니라, 전 피조물과의 사건이기도 하다. 더욱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는 시작일 뿐, 결코 목적이나 결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메튜 폭스의 우주적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중심주의적 구원론을 넘어서며, 창조물과의 깊은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또한 그에 의하면, 우주적 그리스도는 만물의 머리가 되시기에 만유는 그 안에 있고, 그는 만유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우주적 그리스도는 피조물의 고통과 아픔에 깊이 참여하시며 연대하신다. 여기에서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론적 인식론과 세계관은 극복된다. 더욱이 창조세계와 우주적 그리스도는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자연스럽게 창조세계 역시 신학의 지평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므로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구절은 자연을 지배와 착취의 대상이 아닌 관리와 보호의 대상임이 판명난다. 더욱이 메튜 폭스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최근 과학적 성과물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신학적 유산들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