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24일부터 9월 28일까지 일본 정부여당의 실력자 가네마루 신(金丸信)은 자민당과 사회당 의원들로 구성된 방북단을 이끌고 평양을 공식 방문하여 김일성과의 별도 회담을 통해 국교정상화 교섭에 합의하였다. 가네마루 방북은 정치적 영역에서의 공백 상태에 머물고 있었던 1980년대 북일 관계의 기조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사건이었고, 장래 북일 관계의 윤곽을 잡고, 정부간 수교 교섭의 개시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가네마루 방북은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라고 하는 국제정치적인 요인, 당시 일본 집권 자민당의 리쿠르트 정국 돌파라는 일본 국내정치적 요인, 그리고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고자 했던 북한의 국내정치적 요인이 결합됨으로써 나타났다.
가네마루 방북의 구체적인 성과는 일본의 자민당과 사회당과 북한의 노동당사이에 이루어진 3당 공동선언이란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3당 공동선언에는 과거 식민지시대 36년과 전후 45년에 대한 사죄와 배상, 조속한 국교 수립, 재일조선인의 법적지위 인정과 일본여권의 북한관련 사항 삭제, 하나의 조선 인정, 지구상 모든 지역의 핵위협 제거, 1990년 11월 정부간 교섭 시작, 3당의 협력 강화의 내용이 담겨있다. 특히, 36년의 식민지 통치와 1945년 이후에 대해서도 보상한다는 가네마루의 약속은 북한과 일본이 전후 45년간 단절해왔던 공식적인 대화창구를 단숨에 마련하는 계기를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의 현안문제였던 제18후지산마루의 선원 2명의 석방과, 북일 양국의 국교수립을 위한 정부간 협상 개시가 합의되었다. 그러나 3당 공동선언은 1965년 한일 조약의 틀을 훨씬 벗어나는 것이었고 일본의 36년간 식민지 지배와 전후 45년간의 손실에 대한 사죄와 배상에서 '전후 45년' 부분은 냉전 상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하나의 조선' 논리는 일본의 대 한반도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과 미국 측으로부터의 큰 반발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장래 정부의 교섭에 지장을 초래하게 한 인질외교 라는 비판에 직면함으로써 가네마루 방북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3당 공동선언은 국내에서 인준을 받지 못하였다.
가네마루의 방북을 계기로 시작된 회담은 1991년 1월부터 1992년 11월까지 약 2년 동안 8회에 걸려 개최되었지만 양국의 입장 차이로 국교정상화를 달성하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네마루 방북은 첫째 자민당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공식적인 정부 행위자들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민간외교의 성과를 올리고 일본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는 점, 둘째 전후 보상과 연계된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타진했다는 점, 셋째 역사적으로는 북일 수교 교섭의 첫 물꼬를 트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특히 북한의 입장에서는 향후 북일 수교 교섭에 있어서 북한 측의 요구사항을 상당수 명시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방북과정에서 외무부와 수상보다도 자민당의 실세였던 가네마루 개인의 정치력 영향력이 더 컸다는 점, 그리고 방북단이 정당외교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정부 관리들이 실무회담에 대거 참여하였다는 점, 자민당이 일본정부를 대신하여 양국관계 개선을 마련하고 그 과정에서 야당인 사회당이 가교역할을 한 점은 일본 외교 정책 결정과정의 독특한 특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