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정보
소속
직위
직업
활동분야
주기
서지
국회도서관 서비스 이용에 대한 안내를 해드립니다.
검색결과 (전체 1건)
원문 있는 자료 (1) 열기
원문 아이콘이 없는 경우 국회도서관 방문 시 책자로 이용 가능
목차보기더보기
목차
중국내전기 만주 지방 조선의용군 부대의 활동(1945.8~1946.8) : 목단강 지구의 초기 조선인 부대 활동을 중심으로 / 廉仁鎬 1
1. 머리말 1
2. 조선인 부대의 형성 3
3. 조선인 부대의 활동 12
1) 중국공산당을 지지 12
2) '초비투쟁'과 마교하전투 18
4. 대원들의 처지와 부대의 특징 24
1) 대원들의 처지 24
2) 조선 부대의 특징 26
5. 맺음말 29
[요약] 32
초록보기 더보기
아래와 같다. 첫째, 해방 직후 목단강 지구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곳곳에서 민족 부대를 창설하였다. 1946년 하반기에 작성된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군인 수는 3,200여 명이었고 이는 목단강 지구 전체 군인의 40%에 해당하였다. 잠재되어 왔던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감이 일제 패망과 더불어 적대적으로 드러났고 그런 속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이에 대처하여 군대를 건립했던 것이다. 특히 목단강 지구에서도 목단강시와 영안 동경성 일대를 중심으로 부대가 건립되었는데 이는 목단강시와 동경성 등지에서 일제시기부터 조선인들이 集居해왔을 뿐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 전통을 보존해왔고 나름대로 단결을 유지하고 민족의식을 공통적으로 소유해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둘째, 조선 부대들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이 전개되었을 때 거의 전부가 중국공산당 편에 가담하였다. 그 이유는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련군 조선인 대원들이 현지 조선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목단강으로 들어와 이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목단강 조선인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관내에서 들어온 중국국민당 요원(중국인)들은 조·중 민족갈등과 언어 불소통 때문에 조선인 사회에 침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국민당의 영향 아래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 측이 목단강 지구에 들어오지 않았던 점도 조선인들이 대부분 중국공산당 편에 가담하는 요인이 되었다. 셋째, 조선 부대들은 1946년 들어와 시작된 국·공간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특히 1946년 3월 18일 마교하에서 전개한 전투에서 70여 명의 대원들이 희생되었으며 희생에 격분한 생존 대원들이 중국인 민간인을 학살하여 큰 휴유증을 남겼다. 이후 북만주 일대에서 反朝鮮人 감정이 폭발해 도처에서 조선인들이 국민당 지방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한편 이 전투를 겪으면서 목단강의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을 떠나서는 활로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더욱 중국공산당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또 중국공산당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다. 넷째, 조선 부대는 전투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을 뿐 아니라 부대원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으며 그들의 가족들의 처지도 매우 비참했다. 1946년 하반기 통계에 의하면 3,200여명의 군인 가운데 가족이 목단강 시내에 거주하는 경우가 3/5∼2/3나 되었으며 상당수가 긴급 구호의 대상이었다. 빈궁한 가족들의 처지는 부대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다섯째, 조선 부대원들은 강렬한 민족정서를 지니고 있었으며 부대원들의 군인으로서의 자질은 상대적으로 우수하였다. 민족정서가 강렬했던 만큼 조선인 부대원들은 중국인 대원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배타적이었고, 특히 간부들은 국민당과의 내전에 의의를 느끼지 못했고 반면 조국으로 돌아가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지녔다. 그리고 언어 습관의 같지 않음으로 인해 중국인 지휘관들은 지휘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고 교육을 실시하는데도 어려움이 뒤따랐다. 한편 인내심이 강하고 명령에 충실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이 조선 부대들을 신뢰했다. 목단강 지구에서 국민당 지방부대가 대체로 토벌되면 목단강 조선인 부대들은 지방부대에서 야전군으로 격상되었다. 1946년 12월, 제14퇀 3영, 제15퇀 3영, 제2퇀 3영의 조선인 전사들은 퇀장 황동화(본명 김동규)의 지휘 하에 해방전쟁의 싸움터 곧 국민당 중앙군과 싸우기 위해 목단강 지구 밖으로 진출하였다.102)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후인 1950년 3월 황동화는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중국인민해방군 독립 15사단의 제3퇀 퇀장으로 부대를 이끌고 입북하였으며 6·25전쟁에 참전하였다.103)
권호기사보기
원문구축 및 2018년 이후 자료는 524호에서 직접 열람하십시요.
도서위치안내: 정기간행물실(524호) / 서가번호: 국내08
2018년 이전 정기간행물은 온라인 신청(원문 구축 자료는 원문 이용)
우편복사 목록담기를 완료하였습니다.
* 표시는 필수사항 입니다.
* 주의: 국회도서관 이용자 모두에게 공유서재로 서비스 됩니다.
저장 되었습니다.
로그인을 하시려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모바일 간편 열람증으로 입실한 경우 회원가입을 해야합니다.
공용 PC이므로 한번 더 로그인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를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