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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명/저자명
월사 이정구의 외교활동 연구 / 김우진 인기도
발행사항
용인 : 단국대학교 대학원, 2011.8
청구기호
TM 951.5 -11-1
형태사항
v, 56 p. ; 30 cm
자료실
전자자료
제어번호
KDMT1201148372
주기사항
학위논문(석사) -- 단국대학교 대학원, 한국사(조선시대사), 2011.8. 지도교수: 김문식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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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국문초록

목차

I. 머리말 9

II. 생애와 외교활동 11

1. 생애 11

2. 외교활동의 제 양상 15

1) 明接伴使로서의 활동 15

2) 明陳奏·奏請使로서의 활동 18

3) 日·後金에 대한 활동 21

III. 1598년 陳奏副使로서의 활동 26

1. 壬亂전후 명 조정의 의심 26

2. 丁應泰의 誣告 29

3. 이정구의 辨誣奏작성 31

4. 北京에서의 辨誣 35

IV. 1620년 陳奏正使로서의 활동 40

1. 後金의 등장과 명 조정의 의심 40

2. 이정구의 대응책 마련 42

3. 遼陽에서의 辨誣 47

4. 北京에서의 辨誣 51

V. 맺음말 57

참고문헌 59

日文抄錄 63

〈표 1〉 이정구의 접반사 활동 16

〈표 2〉 이정구의 진주·주청사로서의 활동 21

〈표 3〉 丁應泰의 주장과 李廷龜의 반박 31

〈표 4〉 조선 무고 사건에 대한 발언자와 내용 37

〈표 5〉 後金과 朝鮮의 書信 45

〈그림 1〉 명 말기 동북지역과 명·조선의 접경지역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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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일본의 조선침략과 17세기 明·淸 교체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주변국들의 전란에 휩싸이지 않으면서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모색해야 했다. 月沙 李廷龜는 바로 이런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이정구가 특히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이후였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선조의 御前傳譯으로 入侍했고, 명 장수들에게 보내는 외교문서를 담당했다. 이정구는 뛰어난 문장력을 바탕으로 국가적 위기나 책봉 의식과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외교관으로 差出되었는데, 명의 사신을 맞이하는 接伴使로는 총 8차례, 조선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陳奏使나 奏請使로는 총 4차례 선발되었다. 또한 그는 일본과의 通交를 再開하기 위한 會同에 참여하거나, 일본에 보내는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고, 丁卯胡亂 때에는 후금과의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 실무책임자로 활약했다.

특히 1598년과 1619년 두 차례에 걸쳐 명 관리들이 조선을 무고한 사건은 단지 명과 조선의 관계 뿐 만 아니라, 일본 또는 후금과도 연계된 국제적 대립관계에 얽히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1598년(선조 31) 兵部主事 丁應泰가 조선을 誣告한 사건은 丁酉再亂을 둘러싸고 명 조정의 主戰派와 主和派가 대립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휘말린 것이었다. 주화파 丁應泰는 주전파 楊鎬가 島山戰鬪에서 패배하고도 이를 명 조정에 은닉했다고 탄핵했고, 조선에서는 전쟁이 지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명 조정에 奏文을 올려 양호를 두둔했다. 그러자 정응태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조선이 일본을 유인하여 왜란을 일으켰다고 誣陷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정응태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해서 작성한 이정구의 辨誣奏를 채택했고, 선조는 그를 陳奏副使로 지목하여 북경에 파견했다.

북경에 도착한 이정구는 각 아문에 바칠 呈文을 작성하는 한편, 정사 李恒福을 종사하며 변무활동에 참여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명은 조선이 무죄임을 인정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영향을 미쳤다. 첫째, 명은 내국에서 일어나는 다발적인 반란 때문에 빨리 전쟁을 종결하고 내부를 공고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둘째, 終戰을 앞두고 事大國인 입장에서 邊方國인 조선에게 은혜를 베풀고 포섭해 두어야 했다. 셋째, 조선에서 사건의 진위 여부를 조사했던 담당자 徐觀瀾이 조선을 옹호하는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마지막으로 명의 대신들이 이정구가 제시한 奏文과 呈文의 논리를 모두 수긍하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결국 정응태는 官籍이 회수되고 訊問을 받았으며, 조선은 모든 누명을 씻는 咨文을 받게 되었다.

1619년 명 조정에서는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 의심하고 심지어 조선을 監護하자는 의견이 거론되었다. 이것은 광해군이 추진해 오던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에서 발생된 사건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광해군은 이정구를 進奏正使로 지목했다. 이에 이정구는 奏文작성에 참여하고, 광해군 및 비변사와 함께 대안을 마련한 후 출발했다.

요양에 도착한 이정구는 遼東經略 熊廷弼을 만나 조선과 후금 사이의 우호관계를 부정하고, 오히려 조선은 후금을 상대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당시 요양에 만연해 있었던 조선이 후금에게 禮物과 배를 바쳤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후금과는 지리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운반하기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북경에서 이정구는 각 아문에 바칠 呈文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인맥을 통해 兵部 給事中 薛鳳翔이 당시의 실세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설봉상을 포함하여 조선에 우호적인 대신들을 중심으로 좀 더 정밀하고 집약적인 변무활동을 펼쳤다. 이런 이정구 일행의 활동과 함께 후금이 본격적으로 중원에 진출하고 있고, 명 황제 神宗의 건강이 위중한 상태에서 薛鳳翔이 回心한 결과, 일행은 조선의 무죄를 인정하는 勅書를 받고 귀국할 수 있었다.

물론 이정구가 추구했던 외교노선이 항상 당대의 국왕들과 일치했던 것은 아니며, 그의 외교활동이 언제나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또한 가능하면 외교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명 정부와 조선 정부의 노력으로 인해 사행업무를 비교적 수월하게 완수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정구는 그의 문학적 소양과 함께 넓은 정보 네트워크, 정확한 상황 판단력, 신속한 대응 능력을 바탕으로 선조대로부터 광해군·인조대에 이르기까지 明·日·後金(淸)을 상대로 다양할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정구는 국가적으로 큰 혼란과 위기가 있을 때마다 기용되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華國手段' 즉 나라를 빛내는 능력을 발휘한 외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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