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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명/저자명
경복궁 중건 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 이혜원 인기도
발행사항
수원 : 경기대학교 대학원, 2009.8
청구기호
TD 690 -9-510
형태사항
xi, 213 p. ; 26 cm
자료실
전자자료
제어번호
KDMT1200953320
주기사항
학위논문(박사) -- 경기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 2009.8. 지도교수: 김동욱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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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목차

논문개요 12

I. 서론 15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15

2. 연구사료의 검토 19

1) 「경복궁배치도」 20

2) 「북궐도형」 23

3. 연구방법과 내용 26

II. 중건 경복궁의 시기별 변화 29

1. 개요 29

1) 고종의 경복궁 임어기간 29

2) 영역의 구분 33

2. 고종 전기(임어 1기 : 1865~1876년)의 중건과 소실 40

1) 경복궁의 중건과 「경복궁전도」 40

2) 내전일곽의 반복된 화재 50

3. 고종 후기(임어 2기 : 1885~1896년)의 중수와 변화 63

1) 내전일곽의 재건과 「경복궁배치도」 63

2) 새로운 전각의 영건과 「북궐도형」 65

III. 중심전각의 존속과 위상 69

1. 외전(外殿)의 근정전과 사정전, 수정전 69

1)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의 위상 69

2) 수정전(修政殿)의 위상변화 73

2. 내전의 강녕전(康寧殿) 84

3. 동궁의 계조당(繼照堂) 90

IV. 내전의 전각구성의 변화와 후원의 정비 98

1. 부속건물의 부가(附加)와 변형 98

1) 교태전(交泰殿)에 부가된 건순합(建順閣) 99

2) 자경전(慈慶殿)일곽의 규모축소 102

2. 새로운 전각의 형성 105

1) 건청궁(乾淸宮)의 부각 105

2) 함화당(咸和堂)·집경당(緝慶堂)과 궁궐내 주택형 전각 114

3) 관문각(觀文閣)에 시도된 서양건축의 시공 122

4) 집옥재(集玉齋)일곽의 조성 127

3. 후원의 이용 확대 140

1) 경무대(景武臺)의 행사 140

2) 경농재(慶農齋)일곽의 재구성 143

V. 빈전(殯殿)·혼전(魂殿)과 진전(眞殿) 일곽의 정립 146

1. 빈전(殯殿)·혼전(魂殿)공간의 정착과정 146

1) 태원전(泰元殿) 147

2) 문경전(文慶殿)·회안전(會安殿)의 부속건물 154

2. 진전(眞殿)일곽의 정립 160

1) 선원전(璿源殿) 일곽의 구성 160

2) 선원전의 바닥구조의 변화 163

VI. 고종후기 경복궁 전각변화의 성격과 의의 166

1. 궁궐내 영역의 중심이동과 전용(轉用) 166

1) 중심의 이동 166

2) 침전 전각의 전용 168

2. 전각 평면구성의 변화 170

3. 표현요소 및 재료의 변화 175

1) 위계의 강조 175

2) 재료와 기술의 시험단계 177

VII. 결론 180

참고문헌 185

부록 191

부록-1〉 경복궁배치도 192

부록-2〉 경복궁후원도 213

부록-3〉 경복궁 관련 상량문 223

Abstract 224

표 1-1〉 고종대의 경복궁 전각 영건 내용 19

표 2-1〉 고종의 경복궁 임어기와 시기구분 32

표 2-2〉 경복궁 중건 이후 건축의 번화와 중요사건 33

표 2-3〉 고종 초 경복궁 중건시 새로 지은 전각 49

표 2-4〉 고종 12년(1875년) 내전일곽의 중수 일정 및 담당관 58

표 2-5〉 1차, 2차 화재에 소실된 건물과 행각(숫자는 칸수) 59

표 2-6〉 중건시 기별 각 건물의 복구 규모 64

표 2-7〉 1888년 내전일곽의 중건 일정 및 담당관 65

표 2-8〉 1888.2~1894.2 동안의 궁궐 중수 내용 67

표 3-1〉 중건 후 근정전의 사용 사례 70

표 3-2〉 고종대 경복궁에서 설행된 진찬의궤와 건물관련 도식 71

표 3-3〉 중건 후 강녕전의 사용 사례 85

표 4-1〉 고종대 비빈(경복궁 중건당시~아관파천 이전) 98

표 4-2〉 자경전일곽의 문, 당호의 변화 104

표 4-3〉 국왕의 재위 당시 어진의 제작과 보관처 139

표 4-4〉 경복궁내 고종의 어진 봉안장소 변화(『승정원일기』) 139

표 5-1〉 신정왕후 국장시 혼전의 시설과 위치 157

표 5-2〉 고종대의 국상과 혼전, 빈전 159

표 5-3〉 선원전의 규모와 부속 건물 163

표 6-1〉 고종 후기 고종의 경복궁 임어기(1885~1896) 내전 이북의 전각 이용 167

그림 1-1〉 비현당 동쪽의 건물 표기(「경복궁배치도」) 22

그림 1-2〉 자경전 동쪽의 상궁처소(「경복궁배치도」) 22

그림 1-3〉 연구의 방법 26

그림 2-1〉 강녕전 동쪽의 생활보조공간(「경복궁배치도」) 36

그림 2-2〉 영역의 구분(「북궐도형」) 39

그림 2-3〉 「경복궁도」 (소더비 경매 출품) 영조대 제작 추정 41

그림 2-4〉 「경복궁전도」 (삼성출판박물관) 41

그림 2-5〉 「경복궁도」 (서울역사박물관소장)-고종대 43

그림 2-6〉 『용호한록(龍湖閒緣)』(규장각)에 실린 경복궁의 배치도-고종대 43

그림 2-7〉 산릉의궤의 간가도(『순조인능산능도감의궤』(1834)) 46

그림 2-8〉 고종초 중건시의 내전일곽과 1차 화재로 소실된 범위(「경복궁배치도」재작도) 52

그림 2-9〉 교태전, 인지당, 자미당, 자경전일곽(「경복궁배치도」) 57

그림 2-10〉 1875년의 1차 내전일곽 중수. 교태전, 인지당, 자미당, 자경전일곽(「북궐도형」) 57

그림 2-11〉 1876년 화재이후~1888년 복구 이전의 모습. 사정전에서 오른쪽으로 아미산까지 전각은 물론, 행각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소실된 것이 보인다(「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문화재청). 60

그림 2-12〉 그림 2-11의 확대. 강녕전과 교태전 일곽. 흥복전 동남장과 그 좌측으로 아미산이 있다. 아미산에서 자경전까지 석축만 남고, 담장이 없으며 자경전 터에는 청연루의 석주호로 보이는 것이 있다. 60

그림 2-13〉 1차 내전일곽의 재건 모습과 2차 화재로 소실된 전각의 범위(「경복궁배치도」재작도) 62

그림 2-14〉 1888년 이후의 중수 내용 68

그림 3-1〉 중건 초기의 근정전 일곽(1868년,「(무진)진찬의궤」 「도식」, 근정전도) 70

그림 3-2〉 고종 후기의 근정전 일곽(1892년,「(임진)진찬의궤」 「도식」, 근정전도) 70

그림 3-3〉 1888년 이전의 사정전일곽(「경복궁배치도」) 72

그림 3-4〉 1888년 이후의 사정전일곽(「북궐도형」) 72

그림 3-5〉 창덕궁 희정당(「동궐도」) 74

그림 3-6〉 수정전 평면도(2002년 복원, 문화재청, 「경복궁 수정전 수리보고서」) 75

그림 3-7〉 1888년 이전의 수정전(「경복궁배치도」) 평면의 주칸 구성은 현재 남아 있는 수정전과 같다. 수정전의 동, 서측으로 담장이 있으며 문이 2개소씩 있다. 중건시의 사료에 의하면 이 담장은 판배이다. 75

그림 3-8〉 수정전 일곽의 구성(「경복궁배치도」, 중건시의 사료와 일치하는 부분은 번호를 부여했고, 사료에 없는 명칭은 직접 써 넣었다.) 80

그림 3-9〉 내각 청사로 개조되어 복도가 설치된 수정전. 『조선조선고적도보』의 사진보다 촬영시기가 앞선 것으로 보인다(『사진으로 보는 서울 1」,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81

그림 3-10〉 일제강점기의 수정전. 1920년경에는 입면의 창호가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조선고적도보』) 81

그림 3-11〉 중건초기~1888년경의 수정전의 중행각과 외행각의 동행각(「경복궁배치도」) 83

그림 3-12〉 갑오개혁 이후의 수정전 중행각의 확장된 모습과 새로 설치된 복도(「북궐도형」) 83

그림 3-13〉 중건초기의 강녕전 일곽(1868년, 『(무진)진찬의궤』) 85

그림 3-14〉 1888년 중수 이후의 강녕전 일곽(1892년, 『(임진)진찬의궤) 85

그림 3-15〉 고종초 중건시 강녕전 서북쪽의 흠경각. 정면 5칸이다. (1868, 『(무진)진찬의궤』 (1868)의 「강녕전도」의 부분) 86

그림 3-16〉 「북궐도형」의 흠경각. 정면 6칸으로 청이 1칸 증가되었다. 86

그림 3-17〉 「경복궁배치도」의 강녕전 88

그림 3-18〉 「북궐도형」의 강녕전 88

그림 3-19〉 1834년 중건된 창덕궁 대조전 평면도(「근대도면집」, 장서각) 88

그림 3-20〉 강녕전 온돌방의 구성(「한국건축조사보고」) 89

그림 3-21〉 계조당 개건 이전의 동궁영역(「경복궁배치도」) 92

그림 3-22〉 계조당 개건 이후의 동궁영역(「북궐도형」) 93

그림 3-23〉 개건 이전의 계조당(「경복궁배치도」) 96

그림 3-24〉 개건 이후의 계조당(「북궐도형」) 96

그림 3-25〉 중건초기의 계조당 일부(1868년,「(무진)진찬의궤」 「도식」, 근정전도 부분) 97

그림 3-26〉 고종 후기의 계조당(1892년,「(임진)진찬의궤」 「도식」, 근정전도 부분) 97

그림 4-1〉 교태전의 온돌방 구성(「한국건축조사보고」) 99

그림 4-2〉 고종초 중건당시의 추정 교태전 일곽(「경복궁배치도」를 재작도함) 100

그림 4-3〉 1876년의 재건 후 교태전 일곽(「경복궁배치도」를 재작도함) 100

그림 4-4〉 건순합을 맞히기 위하여 아미산과 자미당쪽으로 절토한 부분(「북궐도형」) 101

그림 4-5〉 교태전과 건순합(「경복궁배치도」) 102

그림 4-6〉 교태전과 건순합(「북궐도형」) 102

그림 4-7〉 자경전 일곽(「경복궁배치도」) 103

그림 4-8〉 자경전 일곽(「북궐도형」) 103

그림 4-9〉 1888년경의 건청궁 일곽(「경복궁배치도」) 111

그림 4-10〉 1895년 이후의 건청궁 일곽(「북궐도형」) 112

그림 4-11〉 곤녕합지 발굴도의 옥호루 북측 기단기초시설(「경복궁 건청궁 발굴조사보고서」, 문화재청) 112

그림 4-12〉 함화당·집경당 건립이전의 전각(「경복궁배치도」) 115

그림 4-13〉 1890년 건립된 함화당·집경당(「북궐도형」) 115

그림 4-14〉 함화당·집경당 행각지 발굴도(「경복궁 건청궁지 발굴조사보고서」, 문화재청) 117

그림 4-15〉 함화당·집경당 평면도 120

그림 4-16〉 함화당의 이중반자 120

그림 4-17〉 집경당 서온돌의 지벽장지 120

그림 4-18〉 집경당 누마루 하부의 벽 장식 120

그림 4-19〉 함화당, 집경당의 진입동선(「북궐도형」) 121

그림 4-20〉 양관으로 지어진 건청궁 관문각(「병합기념조선사진첩」, 신반도사, 1910) 123

그림 4-21〉 『한국왕비살해 일건(一件)』에 양관(洋館)으로 표현된 관문각(「경복궁 건청궁중견보고서」, 문화재청) 126

그림 4-22〉 집옥재 이건 이전의 보현당과 그 북쪽의 빈 터(「경복궁배치도」) 131

그림 4-23〉 보현당과 집옥재일곽(「북궐도형」) 131

그림 4-24〉 집옥재일곽(「북궐도형」) 132

그림 4-25〉 집옥재 일곽 평면도(「집옥재 수리조사보고서」, 문화재청) 132

그림 4-26〉 집옥재 일곽의 전경 132

그림 4-27〉 집옥재 어칸 단면도(「집옥재 수리조사보고서」, 문화재청) 133

그림 4-28〉 협길당 종단면도(「집옥재 수리조사보고서」, 문화재청) 133

그림 4-29〉 창덕궁의 천지장남지궁, 문화각. 중희당의 서쪽에 있다(「동궐도」) 135

그림 4-30〉 집옥재 횡단면도. 양 협칸은 2층으로 되어 있다.(「집옥재 수리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5) 136

그림 4-31〉 1982년 해체수리시 집옥재의 온돌과 굴뚝(「집옥재 보수공사보고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37

그림 4-32〉 경복궁 교태전 남행각(兩儀門)의 화방벽에 설치된 벽체 내장형의 굴뚝(「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궁궐」, 국립중앙박물관) 137

그림 4-33〉 후원의 용문당, 융무당 전경(1920년대 추정,「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문화재청) 141

그림 4-34〉 북쪽에서 본 융문당, 융무당 전경(「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문화재청) 141

그림 4-35〉 융문당(「북궐도형」) 142

그림 4-36〉 융무당(「북궐도형」) 142

그림 4-37〉 융문당(「조선고적도보」) 142

그림 4-38〉 융무당(「조선고적도보」) 142

그림 4-39〉 헐리고 있는 대유헌(「동아일보」1939년 3월 7일) 144

그림 4-14〉 「경복궁배치도」의 후원 논 부분 145

그림 4-15〉 「북궐도형」의 후원 경농재 부분 145

그림 5-1〉 「경복궁배치도」의 태원전 일곽(중건초기에는 태원전의 전문이 보안문이었는데 경안문으로 바위었으며 건숙문이 2칸이다. 중건초기의 태원전 일곽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48

그림 5-2〉 태원전지 발굴유구 평면도 150

그림 5-3〉 신정왕후 국상시 태원전 주변 행각의 사용 용도(「북궐도형」) 153

그림 5-4〉 중건초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문경전, 회안전영역(「경복궁배치도」) 156

그림 5-5〉 신정왕후 국장시 증축된 혼전의 시설과 위치 157

그림 5-6〉 경운궁의 빈전, 혼전영역(「덕수궁사」, 소전성오) 159

그림 5-7〉 순조대의 창덕궁 선원전 -신실 3실(「동궐도」) 161

그림 5-8〉 창덕궁 선원전-신실 7실(「동궐도형」) 161

그림 5-9〉 경복궁 중건당시의 선원전-신실 6실(「경복궁배치도」) 161

그림 5-10〉 1876~88년경의 선원전 일곽(「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부분확대) 162

그림 5-11〉 경복궁 선원전(「조선고적도보」) 162

그림 5-12〉 경기전의 석탑(石楊). 석탑의 내부 바닥은 온돌이다. 164

그림 5-13〉 경기전 배면의 아궁이 흔적. 하인방이 협칸 보다 높다. 164

그림 5-14〉 경복궁 선원전-신실 7실(「북궐도형」) 165

그림 5-15〉 경운궁 선원전(「진전중건도감의궤」) 165

그림 5-16〉 경운궁의 선원전. 1918년 1월, 고국을 방문한 영친왕의 공식일정 사진으로 경운궁 선원전 방문 모습이다. (「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 서울대학교박물관, 2006.(원소장처-「한말궁중관계사진첩」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 165

그림 6-1〉 흥복전의 평면(「북궐도형」) 170

그림 6-2〉 만경전의 평면(「북궐도형」) 170

그림 6-3〉 흥복전(「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궁궐, 국립중앙박물관) 170

그림 6-4〉 만경전(「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궁궐, 국립중앙박물관) 170

그림 6-5〉 창덕궁 낙선재·석복헌(복원도) 172

그림 6-6〉 함화당·집경당 172

그림 6-7〉 건청궁의 장안당·곤녕합(복원도) 173

그림 6-8〉 집옥재 월대의 계단(「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궁궐, 국립중앙박물관) 175

그림 6-9〉 집옥재 기단 176

그림 6-10〉 당가(「경운궁중건도감의궤」)와 집옥재 내부 비교 176

그림 6-11〉 중화전의 어탑 176

그림 6-12〉 교태전 동측 꽃담 외부. 인지당쪽(「국립중앙박물관유리건판사진」) 179

그림 6-13〉 홍예소문 교태전 서북쪽(「국립중앙박물관유리건판사진」)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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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년에 중건을 시작한 경복궁은 조선 초기에 완성된 법궁의 체제를 따르면서도 조선 후기에 축적된 궁궐건축에 대한 요구사항이 반영되어 완성되었다. 중건되는 전각은 조선 초기에 형성된 전각배치의 기본골격과 건물 명칭을 그대로 따랐다. 이는 조선 초기의 건국정신을 회복하고 장기간 세도정치로 와해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고종의 재위 전반기에는 이와 같은 중건시의 개념에 따라 전각운용을 하였다. 개항과 함께 대내외적인 변화의 요인이 작용하였으며 이는 궁궐의 운영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본 연구는 조선왕조의 봉건적인 개념으로 중건된 경복궁이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변화의 양상과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전각의 배치와 형태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밝히려고 하였다.

경복궁은 고종의 재위기간 중 30년 동안 중심 궁궐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고종이 경복궁에 임어한 시기를 크게 고종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고종 전기(1865~1876년)는 경복궁 중건에서부터 내전일곽에 두 번의 화재와 재건이 반복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중건당시의 전각을 원래의 기능대로 사용하면서 유지한 시기이며 후원에 인접한 북쪽영역에 건청궁을 새로 영건하였다. 고종 후기(1885~1896년)는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면서도 새로운 전각을 내전의 북쪽영역에 새로 조성하여 경복궁의 공간구조가 바뀌게 되는 시기이다. 1888년의 내전일곽의 재건을 시작으로 궁궐내 양관의 건설, 함화당·집경당의 영건, 그리고 창덕궁으로부터 집옥재일곽을 이건하여 조성한 것이다.

본 연구는 도형사료의 분석과 문헌사료를 통한 교차 확인, 발굴조사 및 사진 자료의 확인과정을 거치는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고종 전기와 후기의 경복궁 전각변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도형 사료로서「경복궁배치도」와「북궐도형」이 있다. 두 도형은 사각형의 먹선으로 전각의 평면형태와 규모를 표현하고 전각명칭과 규모를 글씨로 써넣은 일종의 배치도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도형은 구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국가의 영건활동에 있어서 의사소통과 합리적인 계획을 위하여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제작된 것으로 문헌사료에 나타난다.

두 도형의 제작방식은 같지만 표현 방법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경복궁배치도」는 건물의 기능이 기재되어 있으며「북궐도형」보다 앞선 시기인 1888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면이다. 재건된 내전일곽이 포함되어 있지만 본격적으로 경복궁이 변화하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북궐도형」은 1888년에서 1894년 사이의 변화과정이 모두 반영된 도형으로 실제 고종 후기의 경복궁의 배치상황을 잘 보여주는 도형사료이다. 따라서 두 도형사료의 비교를 통하여 문헌사료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었던 전각의 구체적인 형태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었다.

중건이후 경복궁의 전각은 고종 후기까지 외전과 내전의 중심전각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은 고종 후기에는 사용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중심전각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면서 존속하였다. 한차례 재건된 강녕전은 침전의 다른 전각이 약간씩의 변화를 보이는데 비하여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여 재건되었다.

내전영역의 전각은 전각이 가지는 상징성과 위계가 중심전각보다 낮으므로 변화에 대하여 좀 더 자유로웠다. 교태전과 자경전 등은 두 번의 재건과정에서 필요한 부분이 부가되거나 불필요한 부속 건물이 재건에서 제외되었다. 내전의 중심전각인 강녕전이 재건되기 이전(1885~1889년)의 기간 동안은 흥복전과 만경전이 강녕전의 기능을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경복궁 중건시 외전영역에 새로운 전각으로 지은 수정전은 처음에는 건립의도에 맞는 편전의 기능으로 사용되었으나 이곳에 고종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기도 하면서 점차 원래의 기능을 잃어갔다. 고종 후기에는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면서 주변행각이 변형되었다.

내전의 북쪽영역에 새로 지어진 전각들은 건청궁을 중심으로 고종 후반기에 주로 사용된 곳이다. 집옥재가 조성되자 경복궁내의 왕의 거처와 정치의 중심은 내전의 북쪽 영역으로 이동되었다. 건청궁과 집옥재 일곽이 중심이 되면서 신무문 밖의 후원영역의 이용이 확대되었다. 고종 후기에 군사통치권의 장악과 빈번한 과거시험을 위하여 후원의 경무대를 이용하였으며 후원의 서쪽부분은 농사와 관련된 시설을 갖추고 전각을 조성하여 후원 내에서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였다.

영역별 변화과정의 고찰을 통하여 고종 후기 경복궁 임어기의 전각 변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궁궐내 중심이 북쪽영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는 내전일곽의 뒤늦은 복구가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역의 중심이동과 함께 통치와 생활의 기능 구분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봉건사회가 와해되고,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궁궐사용의 변화라고 생각된다.

둘째는 전각의 평면구성이 좌우대칭의 장방형 평면에서 뒤쪽으로 침방이 부가되는 비대칭의 형태로 변화하고 이러한 전각을 더욱 선호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일반 양반주택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창덕궁의 낙선재와 연경당과는 달리 경복궁의 건청궁과 함화당·집경당은 평면구성은 유사하나 온돌의 설치방법과 누마루, 창호 및 내부 마감은 궁궐건축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궁궐내 전각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있다.

셋째는 궁궐건축의 다양한 위계표현요소가 하나의 전각에 과도하게 적용되는 모습을 보이며, 개항이후 도입된 서양의 재료와 기술이 궁궐건축에 실험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계표현의 요소 중에는 외래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으며, 일종의 형식 파괴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건축의 위계를 표현하는 요소의 규범에 집착하면 원래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종대에 중건된 경복궁의 중건당시의 성격은 조선시대 후기 궁궐의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종 후기가 되면서 근대로의 힘든 역정(歷程)을 거쳐야만 했다. 그 속에서 변화되어간 경복궁의 모습이 현재 우리가「북궐도형」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경복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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