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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명/저자명
마한 후기연맹의 형성과 소멸과정 / 오인아 인기도
발행사항
청원군 :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08.2
청구기호
TM 907 -8-6
형태사항
iii, 48 p. ; 26 cm
자료실
전자자료
제어번호
KDMT1200819144
주기사항
학위논문(석사) --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 2008.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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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목차

논문요약 5

머리말 7

I. 전기 마한연맹의 변화 10

1. 목지국 중심 전기 마한연맹의 분열 10

2. 마한 전기연맹체 내의 신미국 18

II. 후기 마한연맹의 형성과 소멸 28

1. 신미국 중심의 마한연맹 형성 28

2. 백제의 복속과 후기 마한연맹체의 소멸 36

맺음말 44

참고문헌 47

ABSTRACT 53

초록보기 더보기

마한은 영도국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이루고 있는 소국연맹체로 기원전 3세기 말경에 성립되었다. 이 마한연맹체를 어떤 세력이 영도해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三國志』의 기사를 통하여 목지국이 마한 전기연맹체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3세기 중반 마한연맹체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이 바로 3세기 중반 일어났던 기리영전투이다. 이 전쟁에서 마한연맹체를 영도하던 목지국이 군현에게 패배 당하였고, 그 결과 목지국은 소멸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한연맹체 또한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마한연맹체 내에는 목지국 외에도 연맹체를 영도할 수 있을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던 소국들이 존재하였고, 그 중 신미국이 목지국의 자리를 대신하며 후기마한연맹체의 영도국이 되었다.

신미국은 해남지역에 위치하였던 마한의 소국 중의 하나이다. 해남 지역은 전기 마한연맹체 내에서 중국군현과 변한 · 왜를 이어주는 해로상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중간 기항지로서의 이득을 얻으며 목지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3세기 중반에 목지국이후 신미국은 목지국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영도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3세기 후반 중국군현의 기능약화와 목지국의 멸망으로 신미국의 정치와 경제적 위상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신미국은 군현을 통한 피동적인 국제관계에서 벗어나, 晉본국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적극적인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미국을 구심점으로 하여 제소국들이 이전과는 다른 후기마한연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 본국의 정치적 혼란과 낙랑 · 대방군이 소멸됨에 따라 신미국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었고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신미국은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369년 백제의 공격을 당하였고, 신미국이 영도하던 후기마한연맹체는 소멸되고 말았다.

그런데 현재 고고학적 성과가 축적되면서, 5~6세기 까지도 영산강유역에 마한의 잔여 세력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백제가 369년에 마한을 정벌한 것은 인정하지만, 4세기 후반부터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영향에서 다시 독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만족시키려면 영산강유역이 독립성을 가지고 독자적인 대외 교섭을 진행한 흔적이나 기록을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지속적인 압력과 통제를 받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서서히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갔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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