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의 제헌헌법과 재정조항에 대한 논의의 과정, 그리고 헌법 제정 직후 행정부의 예산편성과 국회의 승인과정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헌법을 준수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조명하고자 한다. 근대적 재정운용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헌법 재정조항의 규범적 목표와 실무적 현실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었는지 당시 상황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근대 재정 출발을 이해할 수 있는데, 선진국의 역사적 경험을 이해하고 이들로부터 제도적 교훈을 도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다. 1948년 제헌헌법 이후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한국 재정헌법의 특징은 ‘의회의 증액 및 신비목설치 금지’와 ‘예산 비법률주의’라는 원칙이다. 이들 두 원칙의 공존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특징인데, 본 연구는 이들이 채택된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한국 국회는 1949년 1월부터 4개월간 헌법의 예산규정을 준수하고자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국민 전체의 복리’를 추구하는 예산을 승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근대적 재정의 핵심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근대적 재정운용이 미국 등 서구에서는 “대표없이 과세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표어로 표현되지만, 한국에서는 “대표없이 예산없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 개의 예산안이 한꺼번에 국회의 승인을 받고 다음 연도 예산안이 제출되었던 1949년 3월 31일은 한국이 근대적 재정운용의 출발선에 선 날로 길이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