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정유재란 막바지인 1598년에 벌어졌던사천 전투를 패전 원인과 영향에 중점을 두고 재검토해서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전투의 재구성과 임진전쟁의 실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정유재란 초기의 일본군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에 나선 조명연합군은 울산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양호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사로병진 작전을 입안했고, 사천이 작전목표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다. 일본군은 1597년 이곳을 요새화했고,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1만 5천 명의 병력이 오늘날의 선진리왜성인 사천왜성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1598년 9월 동일원의 지휘하는 2만 9천의 조명연합군은 진격을 개시했고, 지성들을 함락하며 사천왜성에 육박했다. 처음에는 조명연합군이 우세했지만 화약 폭발사고로 인해 진영에 혼란이 발생했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일본군의 역습에 명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패주하게 되었다.
비록 화약폭발 사고가 패전의 결정적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조명연합군에게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요새화된 왜성을 공격하기에는 조명연합군의 전력이 충분하지 않았으며, 보급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혼합군으로 구성된 명군의 결속력은 약했으며, 북병으로 구성된 기병은 공성전에 적합한병종이 아니었다. 반면 일본군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면서노련하게 조명연합군을 상대했다.
사천 전투의 패전 후 명군의 전투의지는 사라졌다. 그런점에서 사천 전투는 정유재란 막바지에 명의 입장을 바꾼결정적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