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수군은 육군과 별도의 지휘 체계가 아닌일원화되어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수군은 육군과는 독립된 병종으로창설되었다. 조선 조정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바로 수군을 창설한 배경을 살펴보면 왜구를 빼놓을 수 없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는지리적 특성상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은 항상 있었지만 1350년(충정왕2)부터 왜구의 침입 성격이 변화하였다. ‘경인의 왜구’라고 불리는 1350년이후의 왜구는 대규모화하기 시작하였고, 고려는 왜구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조선왕조는 건국 직후, 왜구 방비를 위해 수군을 독립된 병종으로서 제도적으로 정비해 나가는 한편, 군선 건조에 역점을 두었다. 조선 조정은 수군액 확보와 군선이 신속히 출항할수 있는 정박 거점을 찾는 등 왜구 대응책 마련에 힘썼다.
전라도는 왜구 침입 경로에 있고 물산이 풍부하여 잦은 침입을 당하였다. 조선 전기 서해로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전라수영이 옥구현(현 군산시)에 설치되었다. 옥구는 바다와 만나는 접경에 있어 수상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수군진의 입지로는 최적지였다.
왜구의 활동이 태종대 급증하자 조정은 병선을 배치하기 위해 정박하기 적당한 곳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옥구는 전라도 전 지역을 방어할때 너무 위쪽에 있는 것이 문제였다. 서남해안으로 침입해오는 왜구를막기에 한계가 있어 전라수영은 옥구에서 무안현 대굴포로 이설한다.
무안현 대굴포 전라수영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은폐하기 좋고, 해변으로 진입하는 왜선을 파악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극적인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에 병선을 깊은 곳에 두면서 병선 배치 지역을 확대하려다 보니 병선과 수군의 증강액이 끝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병선의 경계 범위와 작전 반경, 기동성을 높여 병선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수동적인 거점 방어에서 공격적인 방어 전략으로의 전환이었다. 공격적인 방어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남해안을 지키는전라수영의 이설이 필요했다. 이 당시에 해안 안쪽으로 설치된 군사 거점을 밖으로 끌어내는 전환은 전국 곳곳에 보이는 군사 전략의 특징이다. 전라수영도 내륙에 있던 대굴포에서 바닷가에 인접한 해남 황원곶으로 이설한다.
해남 황원곶에 정착한 전라수영은 사량진왜변ㆍ을묘왜변 등 빈번한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우수영과 좌수영으로 분립하게 된다.
수군진의 이설과 편제 변화는 왜구의 성격과 관련이 있으며, 전라우수영도 왜구의 이동로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서남해안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전라우수영은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몇 차례의 이설과정을 겪었다. 전라우수영의 위치 변화를 통해 당시의 해상 방어 전략의 일단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