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년 완공된 晝長城(현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 즉 漢 山州 방면 최대의 병참 지원기지이자 비상시의 淸野入保까지도 수행 가능한 거점으로서, 그 전례 없는 규모 및 입지, 발전된 축성 기술 등의 요소를 통해 볼 때 해당 지역의 기존 關防 체계의 한계를보완하려는 취지에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 이는남한강 수로를 매개로 國原(小京)城과 州治 사이의 연계를 보다 강화하면서 王京 및 남부 방면의 인력과 물자 등을 漢山州 방면까지 원활히 유통시키도록 하는 기능도 수행했을 것이다.
이 晝長城은 본래 668년 이래로 전후 처리를 둘러싼 나당 간의갈등이 심화되는 한편 신라가 옛 고구려의 영토 및 주민을 대상으로 보다 적극적인 북진경략을 추진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그러한 신라의 전략적 움직임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처음 계획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672년 8월 석문전투의 패전을 계기로 직후 守城·持久戰 전략이 채택됨 따라 다소 급박하게 완공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완공 이후 이 晝長城은 그 특별한 규모 및 입지를 활용하여인력과 물자의 수용·집결 및 보급과 같은 병참 지원 및 비상시의淸野入保을 통해 漢山州 관내의 종심 방어망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문 군사조직으로서 (漢山州)節末幢과 같은 부대가 晝長城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漢山州의 晝長城을 필두로 國原城 등의 新·增 築을 통한 전국적인 關防 체계의 정비가 완성된 673년 후반부터, 부담스러운 장거리 원정을 강요받았던 당군에 비해 병참 등의 諸요소에 있어 신라군이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더 나아가 이는 당연히 將兵들의 전반적인 사기 증진 및 전투력 유지와도 직결되는 요인이었던 만큼, 궁극적으로는 나당전쟁 자체가사실상 신라의 승전에 가까운 형태로 종결될 수 있었던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