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시기적으로 5세기 후반∼7세기 중반, 공간적으로반월성을 중심으로 한 포천지역의 관방체계에 대해 검토한 연구이다.
포천지역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며 서울과 원산을 잇는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형성된 교통로가 지나기에 선사시대부터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장이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을 계기로 포천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고구려는 한강∼임진강 유역에 다수의 관방시설을 축조하였는데, 포천지역에는 고구려 관방시설 관련 고고자료가 한강∼임진강 유역의 다른 교통로에 비하여 빈약하다. 포천 일대는 한강∼임진강 유역 교통로 중 우회하는 경로이기에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고구려가 원산만 일대의 예(말갈)를 동원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공격할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5세기 후반∼6세기 중반 반월성은 관방시설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았고, 고구려는 성동리산성일대를 중심으로 포천지역을 경영하였다.
603년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한 군사행동에 나서며철원-포천-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이용하였다. 이는 신라가 포천지역의 군사지리적 중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608 년 고구려가 영서 내륙 지역을 공략하며 철원-포천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고구려는 지금의 반월성으로 추정되는 낭비성을 차지하며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를 위협하였다. 629년 신라는 대규모 군대를편성하여 낭비성을 빼앗았으며, 이후 신라는 반월성을 중심으로 포천지역의 관방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신라가 대고구려 전쟁, 대당전쟁에서 승리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