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G. 제발트의 전원에 머문 날들은 제발트 자신의 삶에 평생 동반자가 되어준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형식의 작가초상을 담고 있다. 이 에세이 모음집은 매우 사적이며 일종의 ‘은폐된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켈러에게 헌사한 에세이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에서는 제발트의 주요 작품 곳곳에 드리운 켈러 작품의 흔적을 많이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제발트의 이민자들 중 화가 막스 아우라흐의 이야기는 제발트의 자서전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는 텍스트로서 켈러의 자전적 소설 초록의 하인리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본고는 이 두 텍스트를 중심으로 제발트와 켈러의 긴밀한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초록의 하인리히가 화가로서의 삶과 결별하기 직전 그린 거대한 낙서 그림과 그 아틀리에 장면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제발트의 화가 막스 아우라흐의 먼지와 번뇌로 가득찬 아뜰리에 장면에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초록의 하인리히와 막스 아우라흐의 그림그리기의 딜레마는 궁극적으로 작가의 글쓰기의 문제로 연결된다. 결국 켈러가 그린 “거대한 잿빛 거미줄”은 제발트에게 있어 미로처럼 파생되고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연상의 고리이자 멜랑콜리한 글쓰기의 메타퍼이다. 두 작가의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시공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조응하고 그림과 글쓰기가 서로 다른 질료를 가진 상동성을 지닌 작업임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