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문(山水文)’ 청화백자는 18세기 이후에 성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나 17세기에 유행한 철화백자에서는 산수문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수문 청화백자가 언제부터, 어떤 주제로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상태다. 청화백자 산수문의 제작 시기와 관련해서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연잉군(延礽君) 시절에 손바닥만 한 유지(油紙)에 수묵으로 그린 화초(花草) 네 폭과 산수 두 폭을 번조소(燔造所)로 가는 종[胥隷]에게 보내며 작은 항아리[小壺]를 구워 오게 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이 일화의 출처는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자신이 소장한 매화 한 폭이 결실된 영조의 다섯 폭 도자기 밑그림으로 만든 화첩(畫帖)에 1724년에 쓴 글이다. 이 글은 산수문 도자기가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부터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도 한다.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이 논문은 영조 즉위 후 노론과 안동 김씨 가문의 상징적 인물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에게 시호를 내리는 것을 논의한 날 경종의 희귀한 어필인 ‘장한강동거’ 구절이 노론의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 새롭게 환기되었을 맥락에 주목하였다. 김시민이 자신이 소장한 영조의 도자기 밑그림 산수도를 ‘장한강동거’와 관련시켰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숙종 사후 노론의 핵심 인사들은 연잉군 시절의 영조가 부왕인 숙종의 자질을 이어 그림에 조예가 깊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김시민의 어화첩 제발도 이러한 노론 핵심 인사들의 논조를 공유했다는 점에 이 논문은 주목하였다. 영조에 대한 신화가 새롭게 만들어지던 당시의 문화적 맥락에서 접근할 때, 청화백자 산수문의 주제 및 형식, 제작 시기 등에 대한 미술사적 이해도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청화백자 산수문에 그려진 가을바람 부는 해질녘과 달밤의 운치 있는 광활한 수면 풍경은 당시 문사(文士)들 마음에 감흥을 일으키는 시적 정취가 넘치는 산수공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갑번자기를 주문하고 향유할 수 있었던 18세기 전반 장동(壯洞)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취향과 이들의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청화백자 산수문도 재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