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황기환은 한성일어학교에서 수학하다가 190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터를 잡은 그는 시카고에 거주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군에 입대하여 유럽전선에 배치되었다. 1919년 6월 파리의 한국대표부에 합류한 황기환은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8월 구미위원부로 개편된 파리위원부는 유럽지역 외교, 선전활동을 담당하는 한편 한국인에 대한 지원과 외국인 지지자의 결속에 힘을쏟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는 강대국들이 좌지우지하며 소위 약소국들에 실망만을 안겨줬지만, 제국주의 열강들의 민낯을 드러내고 성찰의 지점을 만들어냈다. 특히 일본의 한국독립운동 탄압에 경악하고 미묘한 갈등을 빚던 영일관계에 주목한 구미위원부는 파리사무소의 런던 이전을 추진하며 선전활동의 반경을 넓혀나갔다.
1920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황기환은 런던은물론 지방 각 신문사들과 인터뷰하며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을 선전했다. 그는 절제된 말과 글로 인권과 정의를 강조하며한국인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독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독립운동을지지하는 영국 정계, 언론계 인사들을 결속하여 한국친우회를 결성했다.
이는 미국, 프랑스로 이어지는 한국친우회 결성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로 이어지는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외교·선전활동의 중심에는 빠짐없이 황기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