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경주는 신라의 고도로서 찬란한 황금 문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설화와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역사 도시이다. 이렇게 품고 있는 문화유산 중에 처용무 역시 과거에 경주에서 품었을 것이나, 지금까지 연구의 부재로 인해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었다. 이 글은 15세기와 18세기 경주에서의 처용무 연행 여부와 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시도한 글이다.
서거정의 『사가집』과 김종직의 『점필재집』을 근거로 볼 때 1462~ 1466년 전후 시기까지 경주에서 처용무가 황창무와 함께 연행된 것으로 포착되었다. 이러한 경주의 처용무가 다른 지역으로 영향을 끼쳤으니, 그 지역은 안동과 진주였다.
『영조조 갑자년 진연의궤』에 의하면 1744년 경주에서의 처용무에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경 주 기녀 옥란(玉蘭)과 채옥(彩玉)이 1744년에 선상(選上) 기녀로 한양을 갔는데, 장악원 전악 강취성(强就成)과 황세대(黃世大)로부터 ‘궁중 처용무’를 습득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경주에서의 처용무는 ‘기존 처용무’에서 ‘궁중 처용무’ 양상으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구체적인 변화 요인은 자료의 부재로 밝히기 어렵다.
이렇듯 15세기와 18세기 경주에서의 처용무 연행 여부를 탐색한 결과 경주에서는 처용 설화가 발생한 이후 약 900년 동안 처용무를 품고 있었고, 그 중에서 전반기 860년 동안은 기존의 처용무를 연행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 반면 18세기에는 궁중풍의 처용무를 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결과적으로 15세기와 18세기 경주에서 처용무가 연행된 사실은 경주에서 처용무의 역사성을 밝히는 데 단서가 되며, 향후 경주가 처용무를 품은 역사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