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왕실 예전인 『국조속오례의』 에는 조선 전기와 달라진 예제를 적용하면서 ‘천장의’를 추가하여 무덤을 천봉할 때의 과정을 담았다. 이처럼 조선 후기는 전기와 달리 천봉이 본격적으로 행해지는데 이는 생전의 왕의 뜻과 달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15세기 태조, 태종과 세종은 왕후가 먼저 승하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릉의 조성 및 능침사찰의 관리까지 관여하였다. 16-17세기는 예학에 맞게 추존을 중심으로 능을 천봉하여 예우하였고, 사친과 관련된 인물 무덤을 주로 천봉하였다.
반면에 19세기의 천봉은 사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철종 대에 천봉된 무덤은 대체로 순조, 순조의 사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무덤이었고, 두 번씩 천봉하면서 영조와 정조처럼 세자가 탄생하기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19세기의 능 석물은 새롭게 조성되는 경우가 드물고 기존에 능역에서 사용하였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으며, 새로 만드는 경우에도 조형미가 떨어진 형상을 보여 왕조 말기 미술의 해체적인 양식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