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2개 이상의 색으로 장식한 ‘다채백자’와 기면 전체를 마치 유약으로 시유한 것처럼 채색한 ‘단색백자’는 조선후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신품종으로 이른바 ‘新’ 채색백자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백자에 등장하는 여러 색의 변주는 조선백자 생산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채색백자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이미 일상생활에 보편화된 청과 후발주자인 일본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외래 채색자기의 문화를 수용하는 조선은 청 문물을 적극 평가하며 그 도입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성리학적 위계질서 하에 尊卑等威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색의 개방이 전격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후기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신분에 따른 색의 제한이 작동되지 못한 상황은 색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이어졌다.
19세기 북학에 의한 고증학의 수용은 현실에 바탕을 두어 사물을 변증하고자 하였고, 색의 사용은 바로 대상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사실성을 중시하고자 한 표현이었다. 전 계층에 의해 향유된 색은 다양한 채색자기의 탄생과 사용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조선후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색의 복권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