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건물의 아름다움, 다른 건물과의 차별성을 드러낼 때 가장 강조했던 건물의 외형은 지붕이었다. 그중에서도 지붕 용마루의 끝단에 설치하는 장식기와는 구조적·장식적 기능을 두루 가진 건축 부재이다. 이처럼 상징성이 큰 장식기와는 일찍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아 변화·발전해 왔다.
그런데 최근 태안 앞바다에서 왕실 등 권위 있는 건물을 장식하는 지붕 장식 부재인 취두(鷲頭)가 출토되었다. 입을 크게 벌린 용의 얼굴이 정교하게 새겨진 취두가 완전한 모습으로 발굴된 유일한 사례이다. 이에먼저 태안 출토품을 현재 중국 건축물에 설치되어 있는 명·청대 치문(鴟吻)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태안 출토 취두는 명·청대 치문 양자 모두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럼 다음, 국내에서 확인된 취두 중에 태안 출토품과 유사한 형태와 문양을 가진 것을 비교하여 구체적인 제작시기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태안 취두와 유사한 사례로는 양주 회암사지, 서울 숭례문, 고양 서오릉경릉의 정자각 취두가 있다. 각각의 제작 시기는 회암사지가 1400년대, 숭례문 취두가 늦어도 1479년 이전, 경릉 정자각 취두는 1469년경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태안 취두 역시 1400년대에 제작된 조선 전기 취두로 밝혀졌다.
한편 취두 관련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조선 전기 취두의 제작자는 와서 소속 장인인 잡상장이었다. 취두를 사용하는 건물은 원칙적으로 왕실에 한정되어 궁궐의 주요 전각, 왕릉의 정자각, 도성의 정문 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왕실의 필요에 따라 원칙에서 벗어난 사찰, 비각 등에 이르기까지 취두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왕실과 직접 관련된 공간이 아닌 관아 건축에도 취두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또 비록 조선 후기의 자료이긴 하나 감영 안의 특정 건물에도 취두를 설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국왕의 행행(行幸) 시 군현의 관아가 행궁으로서의 기능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