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창업주인 태조는 후계 구도의 시원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고, 태조의 궁궐로서 경복궁은 이를 공간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에 태종의 부묘가 끝난 후부터 세종은 태종 사후 경복궁에 상주하면서 정무의 공간으로 삼았으며, 후계자인 세자와 세손을 위해 동궁을 정비하였다. 이 기간 세자로의 후계구도 확립을 위한 연이은 세자빈 책봉과 폐출, 원손 출생, 세손 책봉의 과정이 동궁운영에 반영되었다.
이와 함께 세종은 창덕궁 인근 태조와 태종의 혼전에서 연원한 제례공간을 태조의 문소전에 통합하여 경복궁에 이건함으로써 태조 이래의 왕통을 표상하였다. 이는 태조로부터 세종의 즉위까지 이어진 왕위 계승의 파행을 청산하고 적장자 계승의 안정된 후계구도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종대의 궁궐경영을 통해 그동안 명목적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으로서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