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교리 154-6번지, 89-2번지, 31번지의 세 곳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 銘文을 검토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장군의 세 곳에서 출토된 기와 명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東萊, 西面東來郡, 郡 등의 군현 명칭을 기록한 것과 東面, 南面, 西面, 面, 東 등의 方位面 계열의 명문이 중심을 이루며, 이밖에 瓦草 등의 기타 명문이 있다.
본고에서 검토한 세 곳의 기와 명문은 교리 170번지에서 출토된 기와 명문과 거의 동일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機張縣 治所城을 건설하면서 사용한 기와에 機張縣이라는 지명을 새긴 기와는 한 점도 없고, 東萊郡의 方位面을 다양한 글씨체로 새긴 기와만 여러 점이 나왔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고려시기 東平縣 치소성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기와 명문에서도 동평현을 새긴 명문 기와는 없고, 東萊郡 南面 등을 새긴 것만 7점이 발견되었음이 확인된다.
기장현의 치소성 건설에 東萊郡 東面, 西面, 南面에서 만든, 혹은 그곳의 주민이 만든 기와가 사용된 것은 동래군과 기장현의 主縣-屬縣의 지방행정망을 통해서 이루어진 현상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은 동평현 치소성이 동래군의 행정 지원을 받아 건설된 것과도 구분된다. 지방행정망에서 주현-속현의 상하 관계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기장현에서 치소성을 축조할 때, 동래군의 도움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기장현 치소성의 건설에 동래군이 지원이 있었던 이유는 이 두 군현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사실 이외에는 달리 찾기 어렵다.
고려시기에 지방행정적으로 주현-속현 관계로 연결되지 않는 이웃 군현 사이에 치소성의 건설에서 기와 등의 물자가 필요하면 서로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거기에는 다양한 노동력이 동원되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유형의 사례가 있었음이 확인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恭愍王대 이후의 고려말에 지방에서 이루어진 치소성을 비롯한 성곽의 축조에서도 자기 고을 주민 뿐만 아니라 인근 군현의 주민이 동원된 여러 사례가 있었음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