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계추씨는 영조대 이래로 황조인에 대한 우대정책에 편승해서 현조의 현양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이후 사족으로서 지위를 강화해 나갔다. 추적 이후 한국과 중국에 나뉘어 살았던 추씨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추유계가 국내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뚜렷한 인물이 없었기에 세대가 내려올수록 본관은 나뉘어지고 족세는 미약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이후 흩어져 살던 후손들의 본관을 통일하고, 대종가를 형성하여 종통을 확립한 후 현조에 대한 다양한 현양사업을 통해 家格을 꾸준히 높여갔다. 그 결과 대원군의 원사훼철이후에는 전국의 추씨와 유림들의 공의를 모아서 추적의 문묘종사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문묘종사는 실패했지만 추적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추씨 후손들은 정치·사회적 연고를 통해 각지의 명문가와도 통교하며 사회적 관계망을 넓혀나갔으며, 각 종중에서 현조를 현양하는 사업이 별도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영남에서는 명문가와 유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1938년 인흥서원이 복설되었다. 대원군의 훼철령이후 서원을 복설한 곳이 매우 드물었던 상황에서 추계추씨의 서원이 복설된 것은 그만큼 추계추씨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알려준다. 추계추씨의 위상 제고는 현조에 대한 현양사업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현달과 적극적인 사회적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