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 동안 소수서원(紹修書院)·옥산서원(玉山書院)·도산서원(陶山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4개 서원이 수급한 94건의 통문(通文) 분석을 통해, 이 시기 서원의 성격을 살펴본 것이다. 조선 시대 유림 세력은 서원을 중심으로 통문(通文)을 수발급하며, 정치·사회적 요구를 관철시키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해 나갔다.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서원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에도 4개 서원은 여전히 통문을 수·발급하였다. 이 무렵 4개 서원이 수급한 통문의 발급처 중에는 서당(書堂)·단소(壇所)·회중(會中) 등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옛 서원·사우에 해당한다. 이때까지 미복설 서원·사우가 많았지만, 그 조직은 존속된 채 유림 세력의 구심처가 되었다. 통문의 발급 시기도 주목된다. 같은 일제 강점기라도 1920~1930년대에 통문이 집중되며, 1910년대와 1939~1945년 사이에 발급된 통문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식민지 통치 기구의 1910년대 무단통치, 1920년대 이후의 소위 문화통치, 1939년 이후의 전시체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개 서원이 수급한 통문을 내용별로 살펴보면, 원사(院祠) 복설 및 신설, 현조(顯祖) 및 유현(儒賢)에 대한 추숭사업과 행실이 탁월한 자에 대한 포장(褒獎), 문자 시비 등과 관련된 향중 쟁단, 그리고 사문(斯文) 수호가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통문들은 근대 전환기를 거치면서 서원의 위상과 기능이 크게 변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림 공론을 형성하는데 서원이 중요한 매개체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 통문 중 조선 시대처럼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룬 사례는 전무하다. 사회 구조가 재편되는 가운데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고, 가문 단위의 유림 집단이 지역 내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획득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서원 통문을 활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