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기독교인 김동수 3형제는 이동휘와 함께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일진회가 고종의 퇴위를 요구하고‘어가동도설’이 유포되자 일진회 강화지회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7년 3월 대한자강회 강화지회를 결성한 이동휘는 7월 20일경 이후김동수 등과 수차례 집회를 열고 군중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이과정에서 일진회와의 관계도 더욱 악화되었다. 이동휘가 강화를 떠난 이후인 8월 9일 강화의 진위대원 및 주민이 합세하여 의병투쟁에 나섰지만 8월 10일 일병이 강화를 장악했다. 그리고서울의 일진회원이 강화에 들어와 강화의 일진회원과 함께 일병을 도우며 의병봉기에 가담한 주민을 색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들은 평소감정이 좋지 않던 주민을 일병에게 무고했으며, 여기에 김동수 3형제 등이 포함되었다. 일병이 이들을 구금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의병봉기에가담했다는 것이었다. 일병은 김동수 3형제 등 7명을 서울로 압송한다면서 중도에 사살했다. 명분은 이들이 도주를 시도하며 저항했다는 것이지만 실제 이유는 이들의 의병봉기 가담 혐의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의병봉기를주도한 진위대원을 한명도 체포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일병으로서는 주1907년 강화도 기독교인 김동수 형제의 순국 과정 39 도자 검거 실적이 필요했고, 김동수 3형제 등 7명은 이같은 일병의 계책에 희생되었다. 현재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있는 ‘金東秀’는 ‘군인 김동수’가 아닌 ‘교인 김동수’이다. 하지만 후손이 신청한 것이 아니며, 후손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이다. 김남수와 김영구, 김근식 등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될만한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