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는 유가(儒家) 사상에 기초하여 부장된 물품을 뜻하는 말로 공자는 인(仁)을 바탕으로 효(孝)를 실천하기 위해 예(禮)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무덤을 조성할 때도 사자(死者)에게 예를 다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을 무덤에 넣어주되,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산자가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을 부장하도록 하였다. 이때 부장만을 위해 만들어진 물품은 생자(生者)의 것과 구별된 신명(神明)의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에서 ‘명기(明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류가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에 부장품을 넣어주는 관습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확인되고 있으나 동아시아에서 부장의 예법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이르면 하왕조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부장품의 개념은 늦어도 동주(東周)시대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의례의 시행 방식 또한 동시기에 규정되기 시작했으나, 후대에 점차 보완되어 구체화 되었고, 후한대 들어 유학의 성립과 함께 개념 및 방식에 대한 세부 규정이 마련된 것으로 보았다.
한나라 이후 위진(魏晉)시대에는 부장품 가운데 도기(陶器)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하는데, 북조에서 이를 계승하여 ‘도용’의 부장이 명기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당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를 이어 도용의 부장이 지속되다가 8세기 중반 이후에는 명기의 개념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북송대에는 명기의 부장이 서민층까지 확대되고, 후당대 이래 불교가 유행하면서 민간에서는 불교적 내세관이 반영된 새로운 성격의 종이 명기(冥器)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 밖에도 명기는 또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서지역에서 출토된 송대 명기는 피장자의 삶의 공간을 재현하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부장용으로 제작된 소형의 기물들은 생전에 사용했던 각종 기물을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으며, 도용 역시 피장자를 직접 묘사한 경우도 확인된다. 또한 12지신을 상징하는 도용이 출토되기도 하여 중국 남방의 전통적인 도교적 내세관의 결합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북송대에는 후당대부터 이어져 온 불교식 장례의 유행과 신분을 막론하고 명기를 사치스럽게 부장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이에 명기 부장에 관한 규정은 이전보다 축소된 규모로 품계에 따라 위계를 나타낼 수 있도록 수량을 제한한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