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三國遺事』에 보이는 가야 관련 전승의 역사적 이해와 그 접근 방향을 모색하였다. 『三國遺事』는 가야를 여러 개의 독립적인 정치체로 인식했다. 일연은 『왕력』편에 삼국과 함께 ‘가락’을 설정하고 『기이』편에는 현재 전하지 않는 『(원본) 가락국기』를 간추려 ‘駕洛國記’조를 실었다. 이는 종전 삼국 중심의 고대사 인식 범위와 체계를 가야사까지 확장하여 보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락국기’의 명칭은 대부분 나라 이름을 사용한 『기이』편의 다른 항목과 달리 책 이름으로 되었는데 편찬 당시 확보할 수 있는 관련 자료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락국기’에 전하는 건국 신화의 줄거리는 일정한 역사성을 반영한 것으로 가락국의 기원과 정체성을 알리며, 首露王을 세우고 ‘大駕洛’이라고 한 것은 가야 여러 나라 가운데 큰 세력이라는 자존 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건국 신화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전승이 더해져서 점차 후대의 관념에 윤색되어 전한다. 수로와 脫解의 술법 겨루기와 아유타국 공주를 왕후로 맞는 혼인담은 수로 시조 전승에 결합하여 시조 왕의 신성성을 부각하려는 의도에 부합한다. 그 안에는 수로왕 등장 이전 선주 세력이었던 9간의 시조 전승과 나머지 5가야 건국 신화 등도 얽혀진 것으로 이해된다. 수로 전승은 뒷날 유교 문화와 연관되어 중국 고대의 전설상 聖帝 권위를 빌렸으며, 허왕후 관련 전승은 불교의 권위를 끌어와 신성화 관념을 모색하였다. 또 후대 역사적 인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5가야’조와 ‘가락국기’조의 내용으로 가야의 세력범위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할 수 있다.
‘5가야’조는 가야를 구성하는 여러 개의 정치체가 다섯 혹은 여섯으로 서로 다르게 인식한 원전 기록인 『가락기』의 ‘贊’과 『本朝史略』을 모두 전한다. 『가락기』의 ‘찬’은 ‘가락국기’에 실린 ‘銘’, 그리고 『본조사략』은 李齊賢이 편찬한 『史略』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주사 金良鎰이 지은 ‘명’은 수로왕 건국에 대한 개인적 축송을 목적으로 찬술했을 법하다. 그 뒤 ‘금관지주사 문인’은 『(원본) 가락국기』를 편찬하면서 ‘명’의 내용에 수로왕 이후 역사를 추가 보완하였고, 일연은 이를 간추려 ‘가락국기’조를 찬술한 것으로 보인다.
‘가락국기’조의 유일한 인용서목인 ‘『開皇曆(錄)』’은 고려 건국 시기 수로왕 직계 후손 집안에서 편찬한 가락국 역사서로 짐작된다. 『개황력』에는 신라가 법흥왕 19년에 가락국을 합병했다고 전하는데, 그 뒤 일연은 ‘가락국기’에서 신라 진흥왕 23년에 가락국이 멸망한 사실을 추가하였다. 이는 신라에 자진 합병한 사실을 꺼렸던 가락 왕손이 대가야 멸망 시기를 의도적으로 인용한 『(원본) 가락국기』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된다.
‘가락국기’의 허왕후 전승은 수로 전승보다 뚜렷하게 불교 신앙으로 신성화된 모습을 전한다. 그리고 ‘王后寺’ 건립 전승과 함께 ‘金官城婆娑石塔’에서 허황옥이 가져온 파사석탑 기록은 후대에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것으로 불교적 윤색에 따른 결과다. ‘魚山佛影’에서 만어산 나찰녀를 교화하여 불법의 효험을 부각하는 불교적 설화에 ‘가라국’의 수로왕 탄생과 역할을 연결한 기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자료는 불교 전래 이후 가락국과 불교가 결부되어 편찬한 ‘古記’ 내용을 ‘가락국기’ 찬술 시에 반영한 것으로, 이를 통해 김해 인근의 외곽지역에 불교적으로 윤색되어 변모한 가야 인식이 새롭게 확산해 가는 상황을 상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