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 검토한 「전제상정소준수조획(田制詳定所遵守條劃)」은 전제상정소에서 효율적으로 양전을 실행을 위하여 정리한 원칙과 실무지침 매뉴얼이었다. 이영훈은 이 매뉴얼을 상세히 검토한 뒤, 「조획」의 완성은 1460(세조6)~1485(성종16) 사이의 시기로 비정하였고, 세조 이래 1등 양전척만 사용한 동척제였다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수등이척제에서 동척제로 변화했다는 학계의 통념은 오류이며, 조선시대의 『속대전』 같은 자료, 정약용 등 학자들도 오류를 범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영훈의 논증에도 불구하고, 그 논증이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차이, 『경국대전』 이후에도 등장하는 ‘이척(異尺)’의 증거, 조선후기 공통적으로 ‘동척(同尺)’으로의 변화를 갑술양전으로 보는 점 등을 부정하지 못하였다고 필자는 판단하였다.
이에 필자는 이영훈의 견해를 두 가지 방향에서 비판하였다. 첫째, 「조획」의 성립 시기는 11조 전후가 상이하며, ①1444년 11월에 수등이척(隨等異尺)의 『경국대전』 규정이 확정되었고, ②「조획」의 11조 ‘준정결부’ 관련 규정은 갑술양전 이후 동척(同尺)으로 변하여 『속대전』에 실린 것이었다.
둘째, 필자는 「조획」의 성립시기 및 구조에 대한 논의에는 양전의 핵심 개념인 척(尺)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조획」에 견양(見樣)으로 제시된 척, 양전척, 1등척, 척수 등의 용례를, ‘척’ 개념의 다중성, 즉 ①실물의 척(尺), ②법전(法典) 단위의 척, ③측정된 한 변[面] 또는 면적[積]의 표현인 척으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양전척은 ①실물의 척인 포백척도, ②법전(法典) 단위 기준인 주척도 아니었다. 양전척은 ③측정된 길이/면적[面積] 자체였다.
결론적으로, 이영훈의 이척과 동척 논의는 주로 ①실물의 척(尺)과, ③측정된 면적을 혼동함으로써 오류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1결 기준으로 전품(田品)을 1~6품으로 나누든, 1등전척을 중심으로 동일한 면적을 정하고 1~6품의 결수를 조정하든 수세(收稅)의 결과는 같았다. 갑술양전 전후 이척→동척의 변화는 이적동세(異積同稅)→동적이세(同積異稅)로의 전환이었는데, 그렇기에 결부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조선말까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