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조브라조프는 압록강삼림회사의 주주를 구성하여 황실 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니콜라이 2세의 후원 아래 러시아 극동 정책을 추진,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했다. 그는 압록강삼림회사가 한국 북부와 만주, 압록강과 두만강 하구의 영역을 관리하는 동시에 한국에서 일본과 러시아 사이 방벽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베조브라조프는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황제에게 직접 제안했고, 그 승인을 받아 움직였다. 특히 1903년 8월 일본의 러일협상 제안에 대한 러시아의 답변안 작성에서 니콜라이 2세는 한국에서 일본의, 만주에서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규정할 때 ‘유사한’이란 단어를 삽입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한국과 만주문제의 연관성 및 베조브라조프와 니콜라이 2세가 직접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조브라조프는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고 한국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장기적인 계획을 지지했지만 러일협상의 마지막 순간에 ‘러일동맹’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만주를 점령하지 않고 한국의 독립을 유지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가 ‘만주 점령과 한국 보호령’이라는 강경정책에서 ‘러일동맹’이라는 유화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한 것은 한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인식, 그리고 러일동맹을 통해 극동에서 영국을 고립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그러나 베조브라조프는 외교협상에서 일본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하여 러일협상의 실패에 기여했다. 일본은 베조브라조프의 러일협상 대응 방안의 변화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는 동시에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고무라는 러시아가 러일협상을 지연하면 개전할 수 있다는 의견서를 제출했고 일본정부는 2월 4일 전쟁을 결정했다. 그것은 러일개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