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조선 전기 소원 제도의 변화를 신문고의 문서 행정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신문고의 설치 목적은 정치의 得失과 民生의 休戚, 원억, 반역 및 종친‧공신 謀害 등 백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 신문고를 통해 접수된 내용이 합리적이라 판단되면, 조정은 그 의견을 수용하여 제도 신설‧개정 등으로 반영했다. 제도가 정비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신문고는 원억 해소로 집중되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분쟁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신문고는 세종대 부민고소금지법이 시행되었음에도, 자기 원억 해소라는 기조 아래 운영될 수 있다. 이러한 기조는 세조 대를 거쳐 성종 대까지 계속되었다.
신문고는 설치 초기를 제외하면 사실상 행정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갖춰야 할 서류 요건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서류 접수처는 신문고가 걸려있던 의금부 당직청의 당직 관원이었다. 자신의 원억을 접수하기 위해선 해당 사건 관련 부서와 사헌부의 날인이 들어간 퇴장이 필수 요건 사안이었지만, 그 규정이 완화되어 해사의 퇴장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왕이 啓下한 사안은 관련 부서에서 5일 이내에 처리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며, 기한 내에 처리하지 못할 경우 왕에게 그 사유를 보고하도록 했다. 북은 서류 접수 후에 쳤는데, 신문고를 쳤다는 것은 자신의 원억이 왕에게 접수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접수된 원억은 문서로 정리되어 의금부당직, 승정원을 거쳐 왕에게 보고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올라온 원억을 上言 혹은 신문고 상언으로 지칭되었다.
성종 대 신문고 관련 규정의 간소화 조치가 이뤄졌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소원 제도 활용 증가로 이어졌다. 소원 제도의 정체 및 과정의 번거로움은, 소원 제도를 우회‧초월하여 왕에게 자신의 원억을 알릴 수 있는 격쟁의 증가를 일으켰다. 행정화되어 버린 신문고에 비해, 격쟁‧가전신정은 제도와 격식을 우회‧초월해 왕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의 하정상달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었기에, 이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들어주면서도 가급적 신문고 등 정해진 소원 제도를 따를 수 있도록 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