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1920년대 조선 주둔 일본군 항공대의 설치와 설비 확장 과정을 검토하였다. 군사적 차원에서, 초기 일본육군 항공전력의 특징은 조선군 항공대 신설 계획의 배경이었다. 다음으로 왜 평양이 항공대 주둔지가 되었는지, 부지 선정을 위한 조사 자료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육군이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일본 ‘내지’에서 대륙 방면으로 이어지는 경로였다. 그 중에 조선군 기존 위수지였던 대구와 평양이 주목받았고, 평양이 여러 장단점을 절충할 수 있는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평양 주둔 항공대를 기반으로 육군의 비행훈련이 진행되었고, ‘내지’와의 연결과 더불어 대륙으로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육군의 항공전력 투입 범위가 조선 북부 국경을 넘어갈 정도가 되자, 육군은 정찰 및 전투 분과에 폭격대를 추가하였다. 보다 적극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평양 주둔 항공대의 설치와 운용을 통하여, ① 일본 ‘내지’와의 연결 ② 조선 내 ‘치안유지’ ③ 대륙침략의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항공대 주둔은 지역사회의 ‘개발’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지역 간 유치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육군은 이러한 ‘개발’ 욕망을 자극하여 비용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육군과 총독부의 입장이 항상 균일하지는 못했다. 지역사회의 유력자 집단, 그리고 총독부와 일본육군은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경합, 갈등하거나 연대하며 식민 통치체제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비교하면, 폭격 연습장 설비 과정에는 통치체제의 일방적인 객체로서만 인지되어, 탄압 혹은 강압, 기만의 대상으로만 인지되었던 대다수 일반 조선인의 모습이 확인된다. 식민권력 내에서 이해득실에 따라 갈등 및 충돌의 긴장이 존재한 것과 달리, 일반 조선인 지역주민에게는 그러한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