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군대는 1933년 히틀러의 정권 장악을 환영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대폭 약화된 독일의 병력이 나치의 재무장정책에 의해 되살아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군대를 나치즘의 대외정책적 팽창의 도구로 삼고자 했다. 1차대전의 패전국 독일 군대가 국방군으로의 개편을 통해 다시 한 번 유럽의 전쟁을 주도할 위험한 실체로 변모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소수의 반대자들이 군대 안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부의 반대는 처음에는 제3제국 안에서 재편되는 조직 간 세력투쟁의 양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내 히틀러의 전쟁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전개되었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군대 안에 정권을 전복함으로써 무모한 전쟁으로부터 독일을 구할 수 있다는 반대자들의 저항운동이 조직화되고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 대대적인 첫 시도로서 군부 안에서의 1938년 ‘9월 음모’는 히틀러가 전쟁을 기피한 듯이 보였던 기만적 뮌헨협정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2차대전이 인종주의적 절멸전으로 수행됨에 따라 군부 내 반대자들은 도덕적으로 재무장되어 범죄적 정권의 타도와 제3제국과 ‘다른 독일’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1944년 7월 20일 저항을 시도한다. 이 거사가 히틀러의 암살 미수로 비극적인 종말에 이르렀지만 전후 독일의 새로운 출발에 정신적 기반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특히 국방군이 연방군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7월 20일’의 정신은 군사(軍史)적인 연속성으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