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mésentante, disagreement)라는 개념을 빌려와서 5·18 광주항쟁의 의의와 한계, 과제를 새롭게 고찰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5·18과 불화하기라는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첫째, ‘5·18의 정신에 입각하여 X와 불화하기’를 의미하며, 여기에서 5·18은 무엇보다 불화의 정신, 불화의 힘을 의미한다. 하지만 둘째, 이 제목은 또한 ‘5·18에 맞서 5·18과 불화하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5·18의 핵심인 불화의 정신으로 성역화 되고 물신화된 5·18을 문제 삼아야 함을 가리킨다. 결국 이 논문은 5·18을 5·18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5·18이 맞서 싸운 국가폭력의 성격을 해명해야 하는데, 우리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극단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을 극단적 국가폭력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폭력은 비인간적 야만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며, 폭력의 피해자를 동일한 폭력에 오염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5·18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최후의 항쟁 투사들이 대항적 폭력의 유혹을 이겨내고 극단적 국가폭력에 맞서 반폭력적인 투쟁(에티엔 발리바르) 내지 비폭력적인 저항(주디스 버틀러)을 실행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반면 5·18은 한국 사회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의 중심에 빨갱이를 배제하는 극단적 폭력이 존재한다는 통찰에 이르지 못했으며, 그것에 대한 저항을 5·18 자신의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삼지 못했다. 이는 5·18의 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한 불화가 5·18과 불화하기의 장래를 규정함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