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강산도첩》(1832)은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을 임모하여 제작된 시화첩이다. 《신묘년풍악도첩》은 정선이 1711년 백석공 신태동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제작한 화첩이다. 《신묘년풍악도첩》은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금강산도의 시작점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지만, 이 화첩이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본 연구는 《금강산도첩》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질문들 속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 시도이다. 이 화첩의 제작자는 누구인가, 그 제작자는 《신묘년풍악도첩》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리고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정선 작품의 임모작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금강산도첩》은 당시의 유학자인 이재의의 금강산 시문과 여항 화가인 최헌수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재의는 김상용으로부터 이어지는 노론 명문가 출신의 학자로서 그의 집안은 정선의 금강산 여행을 후원한 신태동의 후손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를 통해 《신묘년풍악도첩》이 대를 이어 신태동의 후손에게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재의는 긴밀한 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정선 화첩의 존재를 인지하고 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강산도첩》이 제작된 19세기는 화단에서 정선의 화풍이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던 시기였다. 그러나 화단의 외면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선의 회화를 소장하고 감상하였던 일군의 문사(文士)들이 존재했다. 이들 대부분은 정선 당대부터 그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던 노론 출신의 문인들이었다. 이재의는 정선과 그의 회화를 높이 평가하였던 노론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신묘년풍악도첩》을 임모하여 자신의 금강산 시화첩을 제작했던 것이다. 이처럼 《금강산도첩》의 제작 배경에서 관찰되는 상황은 19세기에 어떻게 정선의 그림들이 전승되고 인식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