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란 어느 특정 인물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 장르로 정의될 수 있다. 그 결과 초상화 제작에는 ‘닮음(likeness)’이란 요소를 구현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 초상화를 보는 사람은 화가가 주인공의 외형을 실제 모습과 비슷하게 재현했을 뿐 아니라 그의 성격, 개성 등의 내적인 면모까지도 아울러 표현했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그것을 그를 ‘닮게’ 그린 그림으로 인식하게 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닮음’의 구현을 자신들이 주문한 초상화 제작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음은 그들이 초상화 제작 시(時)마다 ‘외형을 그대로 본뜰 뿐 아니라 정신을 전한다’는 뜻의 ‘전신사조(傳神寫照)’를 거듭 중요시했던 사실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초상화 장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대략적으로 숙종(肅宗, 재위 1674-1719) 대와 겹친다. 이 시기에 국왕 숙종을 비롯한 명망 있는 학자 및 고위 관료들은 초상화가 가진 다양한 기능과 효용성에 주목하며 초상화 제작에 이전에 없던 관심을 쏟았다. 이때 그들은 화가에게 무엇보다 그 주인공을 ‘닮게’ 재현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화가들도 다양한 초상화 표현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시도함으로써 초상화에 대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평양 출신의 조세걸(曺世傑, 1635년경-1704년 이후), 김진여(金振汝, 1675-1760) 그리고 도화서 소속의 진재해(奏再奚, ?-1735 이전) 등 숙종 대를 대표하는 초상화가들은 중국의 초상화 기법 및 서양화법 등 새로운 초상화 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한편, 전통적인 초상화풍을 계승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을 창안하였다. 이는 이전 시기에 초상화 제작을 주도했던 화가들이 대부분 도화서 소속이었던 것, 그들이 유사한 양식을 공유했던 것, 아울러 각 시기마다 정형화된 초상화 형식이 유행했던 것과 대조된다. 그 결과 사대부들과 화가들은 대상 인물을 핍진(逼眞)하게 재현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거나 무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숙종 대 바로 직전 시점까지 초상화 제작이 크게 위축되었던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사대부 간에 넓게 퍼져 있었던 초상화에 대한 고정된 인식이었다. 그것은 해당 시기에 기량이 뛰어난 화가가 없어 주인공이 ‘닮게’ 재현된 초상화가 제작될 수 없었다는 통념이었다. 17세기 말에 〈태조어진〉의 이모를 추진할 때마다 대신들이 사업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바로 이 논리였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은 대상 인물이 ‘닮게’ 그려진 초상화를 제작하게 되면 그것을 바로 ‘그’로 여길 수 있고 그것을 그의 ‘대체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결국 숙종 대 이후 초상화 제작 사례가 급증하고 초상화를 봉안한 생사(生祠), 영당(影堂), 서원 등 초상화를 봉안 대상으로 한 사우(祠宇)가 전국적으로 큰 폭으로 증가하고 많은 사대부들이 이들 사우를 방문해 봉안된 초상화를 첨배(瞻拜)했던 것도 바로 초상화를 닮게 그리는 문제가 해결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